

||0||0킬 근교에 있는 쉔베르크에 있는 쉔베르크 유스호스텔의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킬 한인선교교회 전교인 가족 수련회로 2008년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1박2일동안 모였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우리들이 묵었던 방의 모습입니다.
아… 참고로 탁자위의 노트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무선 인터넷도 안 되더군요.


||0||0킬 근교에 있는 쉔베르크에 있는 쉔베르크 유스호스텔의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킬 한인선교교회 전교인 가족 수련회로 2008년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1박2일동안 모였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우리들이 묵었던 방의 모습입니다.
아… 참고로 탁자위의 노트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무선 인터넷도 안 되더군요.
은혜의 영성
제8과 은혜의 삶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은 성경적인 교육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더욱 알아가게끔 우리의 눈을 열어주심과 같은 신령한 계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무관심하고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그분은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한 갈급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더욱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가장 능력 있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는 것이 승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은 육적인 삶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위해 수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연합하고 동행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목표나 육적인 것으로 상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의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께 원수가 되는 일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기다려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너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 사람은 독수리의 날개 침과 같이 올라가며 뛰어도 피곤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곤비하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한 사람이 걷고, 걷고 걸었는데 곤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뛰고, 뛰고 또 뛰었는데 어떻게 피곤치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자기의 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힘을 의지하고 뛰고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를 지켜주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닙니다.
1900년도 초기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호수에서 펌프질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펌프질을 하니까 물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아주 열정적으로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피곤할 줄 알았는데 피곤해 하지 않고 계속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계속 저렇게 펌프질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사람은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슈퍼맨인가? 다가갔더니 그것은 사람이 아닌 기계였습니다. 뒤에 스프링이 있었고 핸들을 붙잡고 있어서 계속 움직였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물이 허수아비를 펌프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퍼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함으로 자동으로 터져 나오는 생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짐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할 때에 그분이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능률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하여 사시고 그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제 8과의 은혜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은혜의 삶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감정을 다루려면
1)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때때로 진실과 반대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을 통해서 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증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정적인 느낌에 대하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진리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내가 생각한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감정이 우리를 컨트롤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을 감정이 컨트롤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컨트롤하여야 합니다. 이런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합니까? 때때로 여러분이 의롭지 않다고 느껴질 때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에게 하지 못할 말을 했을 때 아내와 싸웠을 때, 잘못된 생각을 하였을 때 여러분 삶 속에 죄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의롭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추해졌고 더러워졌습니다. 마음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의롭지 않아! 이러한 느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첫째로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압니까?
2) 진리가 무엇인지 결정하십시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119:160)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불의를 느끼고 있을지라도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를 보면 성경은 나를 완전한 의라고 이야기 하고 모든 죄는 사하여 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골2:13-14 성경은 내가 거룩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고전3:17 성경은 내가 의롭다고 말합니다.
롬5:9 성경은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원수가 물처럼 밀려 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대항하여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감정을 믿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뒤져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무엇이 진리인가를 규명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룩한 것 같지 않다고 느끼면 원수가 나를 고소할 때에 나를 비판하고 나를 조롱할 때에 원수의 거짓말을 파괴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고 거짓말은 우리를 메이게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에 매여서 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혹시 여기에서도 거짓말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는 하나님 앞에 다가갈 수 없어, 큰 교회를 이루지 못하여서 나는 인정을 받지 못해,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해야 돼.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폐해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거짓말을 그만하십시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5)
원수가 와서 너는 의롭지 않다고 합니다. 내가 성경말씀으로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리고나서 그 거짓말을 파합니다. 이전에는 원수가 이런 거짓말로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괴상망칙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하나님 너무 죄송합니다. 이런 생각이! 용서해주세요. 나는 추한 사람입니다. 왜 내 사역을 중지시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나를 지금 죽이지 않습니까? 왜 나 같은 추한 사람을 받아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는 죄가 주는 생각입니다. 나는 진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정죄들을 다 받고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원수가 이런 식으로 나를 대적한다면 나를 정죄한다면 저리로 가라고 명하십시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죄가 다가온다면 사탄아 네가 나를 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말하십시오. 내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십시오. 그것을 폐하여 버리십시오. 우리의 생각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다고 치고 이런 생각이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는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거짓말을 폐해버리고 나는 거룩하다고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 그리고나서 진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믿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거짓이 있습니다.
공원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자고 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하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째째할 수 있어요?”
“나 째째하지 않아! 타볼께. 야, 타러가자!”
그래서 거기에 타서 아들과 앉았습니다. 점점 더 높게 올라갑니다. 그 때 감정이 나에게 이야기 합니다. 내 느낌이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 죽을 거야! 너 진짜 죽을 거야.” 더 높이 올라 가면서 느낌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괜찮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탔잖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줄을 서 있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도 안 죽었잖아! 이 놀이기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만들었을 거야. 사람이 죽었다면 이것을 폐쇄하지 그냥 두었겠어? 나는 안 죽을 거야.” 그런데 느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 죽지는 않아도 허리를 다칠 걸.” 그러는 중 다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나는 죽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생각이 납니다. 다시는 안탔습니다. 여러분 내가 느낌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느낌은 저에게 죽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감정이 거짓말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감정이 말하길 너는 거룩하지 않아. 그 때 잠깐 기다려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지 그리고 감정이 한 거짓말을 폐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확인합니다. 감정과 관계없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감정들과 상관없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를 붙드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의롭습니다. 느낌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는 의롭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행동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다시 와서 말합니다. ‘네가 의롭게 행동한다고? 너도 네가 의롭지 못한 것을 알잖아? 네가 의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니? 너는 외식하는 자야.’ 원수가 와서 우리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고소하는 것은 우리가 느낌에 반대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의롭습니까?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 때가 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질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의롭다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습 그래도 행동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그런 척 하는 거잖아? 나는 믿음으로 행하는 거야! 나는 믿음으로 살지 느낌으로 살지 않아!
3) 이런 감정들이란 즉시 바뀌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할 때 점차 진리와 나란히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갱신시킨다면 우리의 느낌도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느낌에 대하여 승리를 맞보게 될 것입니다. 감정이 여러분을 멈추게 하지 마십시오. 감정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감정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월요일 아침마다 나는 사역을 그만 둘거야!“ 라고 말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느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없애 버리십시오.
2.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1) 하나님의 뜻은 길이나 방법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람 그 자체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백합니까?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 만약 내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던지 하나님과 연관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살고 싶다면 예수 안에서 발견된 여러분의 신분을 확인하십시오.
2) 하나님의 뜻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데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숨어 있어서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내가 나가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 계시되는 것이지 나가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릴 수 있는 정도로 큰 음성으로 말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내가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책임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안식하고 기대십시오. 그분이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충분히 충족시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화를 드립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서 가까운 호텔에서 묵고 있습니다. 저는 방향성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운전할 때는 아내가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내가 어디 간다면 항상 가는 길로 갑니다. 만약에 나 혼자 어디 간다면 다시는 아내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기 교회를 떠나서 호텔에 간다고 해 봅시다. 내가 박목사에게 지도를 달라고 해서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약도 밑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적을 수 있습니다. 찾을 수 있는 다른 한 방법입니다. 만약에 박목사가 스티브 목사와 함께 동행해주겠습니다 한다면 그리고 어떻게 그곳에 가는지 보여준다고 하고 같이 차를 타고 나는 운전을 하고 좌회전 우회전하라고 말하고 호텔은 바로 저기에 있다고 한다면 박목사가 지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약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정확해 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이 다 이룹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한 것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나가서 그저 사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느 곳에 홀로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앞에는 멋있는 바다가 있습니다. 오른 쪽에는 지평선이 보이고 숲이 있습니다. 거기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뒤에는 꽃밭들이 있습니다. 그 뒤에는 높은 산이 있는데 꼭대기에는 아직 눈이 있습니다. 가운데서 여러분이 서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라는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이 어딘지 어떻게 압니까? ‘어디로 가기를 원합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잖아. 한번 쳐다봐.’ ‘나는 해변가가 좋은 데!’ ‘아 너는 바다를 좋아하는구나, 해변이 많은데 어느 곳을 좋아하니?’ ‘야자수가 있고 그물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요. 그곳이 굉장히 좋아요’ ‘정말! 좋아! 그러면 뛰어가 즉시 열심히 뜻을 다해 뛰어가! 그리고 자유함을 얻고 뛰어가, 뛰어!’ 저는 뛰어갑니다. 열정적으로 뀌어갑니다. 야자수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팔을 벌리고 있었는데 가보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스티브야 빨리 와,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그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나를 안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내가 이곳을 선택하실 줄 어떻게 아셨어요?’ 예수님은 웃으면서 말씀 하십니다. ‘네가 선택한 것 같으니? 내가 선택한 것이다. 누가 너로 하여금 해변가를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그 야자수 위에 침대를 누가 보게 만들었느냐? 네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예수님, 당신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것을 바로 은혜라고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보십시다. 두려움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무엇을 하고 싶은데요? 해변가를 가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아닐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완전히 뒤틀려진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하고 싶은 사역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을 때 여러분의 열정과 비전을 컨트롤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그냥 놔두고, 제일 하기 싫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오해입니까? 어떤 경우에는 해변가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염려하므로 갑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해변가로 가는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나는 저기로 가야 하는데 이쪽으로는 가기 싫습니다. 나는 가기는 가야 합니다. 원수에게 조롱 당하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사탄은 속이길 잘하잖아요. 믿는 사람도 잘못된 길로 가는 수가 많이 있잖아요.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탄의 역사가 있잖아요? 차라리 사탄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 보다 사탄을 더 두려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탄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게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떨어질 때 잡아주시겠다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삶의 소원을 이루시고 여러분의 생각의 소망을 이루십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으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안 보내 주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 친구 중에 사역을 떠난 분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선택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시길 원하십니까? 어떤 결정을 해야 합니까? 날짜가 가기에 무엇이든지 결정해야 합니다. 더 안타까워서 하나님 무엇이라도 말씀을 해주세요. 결정해야 될 날짜가 다가 왔습니다. 그는 너무 절망가운데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왔습니다. “네가 결정하길 원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결정을 믿는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결정을 믿는다는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결정하실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십시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잠28:1)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영을 준 것이 아니라 담대한 능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믿음 안에서 행한 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때때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내가 해변가로 뛰어갑니다. 그쪽으로 가니까, 햇살은 쏟아지고 바람이 불지요. 내가 생각한 대로입니다. 그곳에서 그물 침대에 누어서 쉽니다. 잠깐 후에 수평선에 구름이 올라왔습니다. 잠시 후 그것은 폭풍이 되었습니다. 그 폭풍이 나에게 다가옵니다. 허리케인이 왔는데 야자수를 붙들고 살아보려고 바둥바둥 거립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곳에 왔구나! 내가 왜 여기 왔지. 하나님의 뜻을 내가 피했구나.”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제가 알라바마에서 조지아로 간 것은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어 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리케인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증명하여 주신 줄 아십니까? 내가 그의 뜻을 놓친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했던 것 말고 다른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그곳에 데려간 곳은 나에게 프로모션을 주려고 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나의 수준을 높이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거기로 가라고 했지 왜 거기 가야 했는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주님은 나를 밑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놓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못된 장소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대부분이 목사님입니다. 목사가 낙심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잘 이해합니다. 목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잘 압니다. 죽고 싶은 생각 이해합니다. 주님께서 데려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대로 안 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의지하고 믿으십시오.
당신의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하나님의 차선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짓말은 믿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여러분을 어디로도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폐기시킬 수 없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단4:35)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다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찾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나님 앞으로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말씀하십니다. 제 아들이 10대였을 때,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데이빗에게 밖에서 풀을 깎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풋볼 게임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데이빗 정원에 까서 풀을 깎어!” 그러나 그는 정신이 팔려서 듣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데이빗!!!” “예!” “정원에 가서 풀을 깍으란 말야!” “아 알았어요.” 제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데이빗에게 ‘어떻게 내 말을 못들을 수 있어 한 쪽 귀는 나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거 아니야!’한다면 이는 얼마나 바보 같은 말입니까. 데이빗은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크게 이야기 하였을 때 그는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3. 은혜의 삶을 살려면
1)성경공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삶으로 사는 것이지 글씨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순종하지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삽니다. 성경을 공부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졸업 앨범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앨범에 보니 예수님이 매 장마다 나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여기에도 있네,’ 신약에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구약에 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있지? 아 여기 있네. 뒷 배경에 있구나. 멋있어.’ 구약에는 뒷 정원에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하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공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입니다. 거기에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목적은 우리가 성경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성경을 몰라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문제들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지식을 얻기 위해서 배운다면 그것은 상처만 줄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해서 지적인 수준만 올라간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픔이 될 것입니다. 고전에 보니 왜냐하면 지식은 튕겨 나온다고 합니다. 신약에 보면 성경에 대하여 통달한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대부분 외워서 사용합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39-40)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연구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느냐?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바로 나인데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에서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생명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2) 기도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기도는 행위가 아니고 삶의 태도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대화의 장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눈감고 달리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매 번마다 기도를 입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와 대화를 많이 나눕니다, 때로는 침묵을 지킬 때도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도 괜찮습니다. 만약에 말 안하는 이유가 있다면 문제이지만, 좋은 사이인데도 말 안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열린 서로의 교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입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계속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하러 왔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7)
그가 우리에게 또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시간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고(이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것 이상입니다. 하나님과 열린 교통을 하는 것이 기도의 개념입니다.
3) 복음증거
복음은 전염성을 지닌 예수님에 대한 열정입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4:20)
완전한 복음은 용서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좋은 소식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오는 죄 사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서도 나눕니다. 지상 명령을 전할 때에 가서 죄 사함만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복음 증거를 하는데 있어서 외부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훈련시킴으로 그들이 예수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발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제자훈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4) 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이 모인 가족입니다. 교회는 빌딩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전부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여러분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족이 있다면 가족에는 여러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12:5)
교회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가지고 있는 신분에 대하여 깨달은 이후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가족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교인들은 그룹 안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던지 교회 안에 있으면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자꾸 제한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루는 다리를 걷고 있는데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뛰어갔습니다. 그가 이야기합니다.
“말리지 마세요. 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안 됩니까?”
“삶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데요!”
“무엇이 있는데요?”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갖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카톨릭입니까? 개신교입니까?”
“개신교입니다.”
“나도 개신교입니다. 성공회입니까? 침례교인입니까?”
“침례교인입니다.”
“나도 침례교인입니다. 하나님 성회의 침례교회입니까? 주님의 교회의 침례교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침례교회입니다.”
“오리지날입니까? 개혁입니까?”
“개혁주의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1879년도에 시작한 것입니까? 1915년도 시작한 것입니까?”
“1915년도에 시작한 하나님의 침례교회입니다.”
“오 그래요. 안타깝군요.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1879년에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율법주의가 바로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걸음을 걸을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가족들은 모든 사람을 포용합니다. 방언을 하는가 못하는가, 침례를 하는가 세례를 주는가, 칼빈교회인가, 알미니안인가, 셀 교회인가 전통주의인가, 기도를 크게 하는가 작게 하는가?… 주님을 의지하면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사람들이 물어보면 내가 왜 하는지 설명하십시오. 사람들이 내 위치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을 그대로 포용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믿는 자들이고 그들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직접 가르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함께 공부한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여러분에게 계시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날 때, 그리고 진리를 사용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사로서 복주시고 그래서 여러분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온전히 인도하는 목사님 되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통해 살아 가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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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출처 : http://blog.daum.net/timberkang/10522862
은혜의 영성
제7과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라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신실하게 헌신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용납이 좌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너는 착한 아이이니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실 거야.”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가 결단코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은혜로 그렇게 하길 선택하셨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용납을 얻기 위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용납하시도록 예수님이 이미 모든 일을 다 해두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적인 용납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전적으로 용납하고 계십니다.
1. 정확한 예수님의 생명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성에 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님의 생명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누리며 살 것인가에 대하여 7과에서 배우겠습니다. 신학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줍니다. 우리는 죽은 교리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교리의 가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교리들은 삶으로 살아질 때에 가치가 인정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
첫 번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미 받은 죄사함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분야에서 사람들이 많이 얽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신분을 발견한 사람이 그 생명을 가지고 살기가 힘든 것이 바로 이 두 분야에 대하여 잘못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념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과 상황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삶속에 있었던 큰 영향들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가르칠 때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육신의 아버지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사랑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설명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율법주의로 만성되어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해 보이겠습니까? 이 질문을 적으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천국에 가면 놀라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던 하나님이 아니더란 것입니다. 7과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7가지 개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적인 고용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적인 고용주로 봅니다. 그분은 고용주고 여러분은 직원입니다. 여러분은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다면 늘 상관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살 것입니다. 종업원들은 일을 조금하고도 상관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들은 야단맞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관으로만 알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그를 위해 계속 하지만 그것은 최소의 것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이십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이상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종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고용주고 우리를 샀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회사에 들어갔는데 그 회사 사장이 아버지라면 그 회사에서 일하는 자기의 자세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내 보스가 내 아버지라면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그 회사는 아버지의 것일 뿐 아니라 내 것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그것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고용을 받은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엄청난 것을 상속받게 될 상태에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4:4-7)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아들이면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합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종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출21:6)
희년이 되면 종이 자유할 수 있는데 그러나 종들이 더 있기를 희망한다면, 그들이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떠나기를 싫어하면 문설주에 귀를 뚫으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상전을 섬기는 것이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전을 너무나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섬기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종이 되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혹한 심판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펴보시면서 언제 실수하나 지켜보는 분이신줄 아십니까. 이것은 두 번째로 잘못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보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상에 앉아서 내가 언제 실수하는지 바라보는 분이라고…
‘또 실수 했군! 너는 언제 성숙할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나 가혹한 하나님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줄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 참을성 없는 부모가 아이들을 때리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삶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나오는 기쁨을 앗아갈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닙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일지라도 나를 싫어하고 있다면 그분 앞에 나가기 힘든 것입니다.
멀리있는 하나님
세 번째로 어떤 경우에는 멀리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작은 일에 대하여서는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굉장한 일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큰 왕으로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3)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이 된 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까이 되었다는 말은 서로 껴안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지구를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제일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이 세가지가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개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심판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침에 운전하려고 나왔는데 차가 펑크가 나 있으면, “아침에 성경을 다 읽었어야 하는데, 내가 15분을 더 기도했어야 하는데”생각하고 그 바퀴 위에 안수합니다. 그리고 그 바퀴를 빼고 갈아 끼웁니다. ‘보험을 들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나는 싫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거야’이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잘못된 일을 보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했구나’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불쌍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람도 자녀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기울여야 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웃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웃고 계신다고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요? 세상에는 너무나 심각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웃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드를 굉장히 부드럽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믿는 모든 자의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빈 무덤은 하나님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승리가 쟁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아주 좋은 무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대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전의 일입니다. 십자가 이후의 백성들에 대한 열정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하여 기뻐하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흥분되어 있는 하나님을 상상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를 바라보면서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위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한사람을 보십니다. “모세야, 엘리야야, 아브라함아 다윗아 다 이리와! 봐라! 천사들도 다 와서 보아라! 이 아들을 보아라. 얼마나 아름답니! 내가 만든 아들이다! 너무나 아름답다. 너무나 자랑스럽다.” 엡2장에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원토록 이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 전부를 반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사랑하십니다.
제가 인디아에서 가르칠 때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코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없었고, 어떤 이는 발과 손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 한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놀라워하시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아십니까?” 그러자 나병에 걸리신 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기쁨이 흘렀습니다. 이 전에 아무도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까?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정말로 여러분의 귀중함을 알려준 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이 안에 오신다면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당신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쓰다듬으시며 “나는 너를 너무 너무 사랑한다. 너는 너무나 귀한 존재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의인이고 너 혼자 죄를 지었다 해도 너를 인하여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원했는가하면 천상을 버리고 이곳에 내가왔다” 말하면서 여러분을 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진짜입니다. 그분은 사랑하시며 웃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계실 때 화가나서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너 왜 잘하지 못했니?”하고 야단을 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손자와 손녀가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입니다. 19살에 장가를 가서 2년 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장님과 딸이 결혼을 하여서 아이를 나습니다. 손녀의 이름은 한나입니다. 손자는 요나단입니다. 제가 손자를 안아서 위로 올려서 웃겼습니다. 그리고 얼렀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런지 심장이 사랑으로 뛰었습니다. 내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것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이 때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내 손자와 놀며 내 셔츠를 벗고 내 침대에 누어서 아이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왝하고 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굴에 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옆으로 던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닦고 그를 다시 안았습니다. 여러분 그 아이가 토한 것 자체를 칭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그대로 사랑합니다. 그 아이가 자랄 것을 믿고 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항상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러분을 옆으로 치워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안으십니다. ‘너는 잘 할거야.’하며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며 우리를 지지하십니다.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로 완전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 여자들은 한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나이가 많아져서 늙어갑니다. 저는 46살입니다. 제 아내는 45살입니다. 그녀가 18살 때 그리고 저는 19살 때 결혼하였습니다. 나의 아내는 가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늙어가고 있어, 나의 엄마와 똑같이 생겼잖아!”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워” “내가 얼마나 늙었는데?” “나는 상관 안해” (물론 46세인데 26세의 형상은 아니지만 그 차이점이 있지만) “나에게는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당신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많은 믿는 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잘못된 것을 자꾸 들추어냅니다. 그러나 신랑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너는 완전하지 않지만 나는 상관 안해”하고 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여러분을 선택하지고 구원하신 분이 여러분이 완전하지 않다고 여러분을 버리신다고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19-22)
성도들이 어느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친절하며 온유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죄 없이 산다는 말은 안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저는 아장아장 걸음을 배우는 어린 손녀에게 걸음을 가르쳤습니다. 그 아이가 자꾸 찻길로 가려고 합니다. 내 손을 놓고. 그러나 절대로 저는 그 손을 놓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걸려서 넘어지고 다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네가 계속 끝가지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가셔서 하나님의 실제가 무엇인지 설교하십시오. 한국교회에는 이런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루에 일곱 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시간이 없어서 1분을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받아 들이셨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기도하고 싶어서 안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에서 은혜주의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행하시던 간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게 말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덜 용납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행하는 행위에 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한 신실하심에 의해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삶을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2. 그의 생명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생명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심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용서함을 받았다는 개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았습니다.
공의는 우리가 받을 만한 당연한 것을 받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공의라는 것은 내가 한 행동에 대하여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공의만을 주장하시는 분이 아닌 것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받을만한 당연한 것을 받지 못할 때 주어집니다.
한 여인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보고 말합니다. “이 사진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했어요!” 사진사가 사진과 사람을 같이 보았습니다. “아주머니, 공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진에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공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마땅히 받아야 될 벌을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받지 못하는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아야 마땅합니까? 지옥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써 그것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엡2장에 보면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지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자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쓰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반쪽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당신의 구원을 이야기 해보십시오?’하고 물으면 “나는 죄사함 받아서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까지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들은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순수하고 완전한 복음은 자비에 은혜를 더합니다.
은혜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구원이란 죄가 없어진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이것이 여러분의 지옥행을 막아줄 지는 모르지만 그 다음 것에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합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경험하는 기적적인 삶입니다. 자비와 은혜입니다. 죄사함과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은혜는 두 가지입니다.
한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과속하면 걸립니다. 벌금 물고 점수가 가산됩니다. 제가 병원에 있는 교인을 심방하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큰 길에서 작은 길로 들어서서 속력을 줄였어야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속력을 줄이지 못했습니다. 계속 운전하고 가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경찰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구인지 아시지요? 그는 경찰이었습니다. 그 때의 기분을 아시지요. 경찰이 왔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십시오. 맥베이씨. 얼마나 빨리 운전하셨는지 아십니까? 잠깐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경찰차 앞에 앉으십시오.” 저는 지옥에 간 목사였습니다. 혹시 교인이 볼까봐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경찰을 티켓을 쓸려고 그 공책을 열었습니다. 볼펜을 찾고 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성경에도 구하면 준다고 했기에 말했습니다.” 그 경찰이 나를 보더니 티켓을 보고 다시 나를 보고 티켓을 보고. “알았습니다. 용서해주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과속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 차로 갈 때에 나는 자비를 느꼈습니다. 나는 티켓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과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비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 경찰관이 은혜를 베풀었네!” “아니 은혜는 안 베풀었어, 그는 자비를 베풀었어.” 은혜는 아니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면 아마 이런 일이 있었야 할 것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냥 가지 말고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무엇이고 사 먹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내가 받지 못할 선물까지 받았으니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지옥에서부터 막아주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받지 못할 선물을 쥐어주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비도 주시고 은혜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사함만을 위하여 오셨다고요? 죄사함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용서된 삶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용서하신 이유는 진짜 선물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죄사함이 있다고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무엇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6)
생명의 떡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생명의 떡이 내려와서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생명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6:40)
제가 이렇게 많은 성경구절을 찾은 이유는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구원은 죄사함 받아서 천국에 가는 이야기를 그만하게 하는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바로 구원은 천국을 마음속에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또한 생명도 받습니다. 구원을 주실 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에 대하여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2)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3-14)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십니다. 시작과 끝을 보고 계시며, 중간에 있는 여러분의 인생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갑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의 몇가지 죄를 위해서였습니까? 모든 죄를 위해서입니다. 의문에 쓰인 율법에 의하여 죽었던 우리가, 마치 청구서에 우리가 물어야 될 돈이 쭉 적혀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예수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죄를 가지고 올라가셨을 때 몇 가지 죄를 가지고 가셨다고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이야기 하셨을 때 몇 가지를 말하신 것입니까? 모든 죄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였을 때 몇 가지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까? 모든 죄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밖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은혜가 우리를 감싸 안았다면 로마서 6:1절의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은혜를 더 크게 하려고 죄를 더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어찌 죄에 대하여 살리오! 어떻게 죽은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감각이 없잖아요?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이 죄악 속에서 살아요?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시체가 되었잖아요? 우리는 물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그 본성은 없어졌습니다.
과거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죄는 어떻게 용서됩니까? 아직 죄를 짓지 않았는데?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여러분은 아직 없었는데 그분이 진 죄의 대가는 몇가지 입니까? 전부 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여러분의 죄는 모두 미래였습니다. 시간이 하나님을 묶어두실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시간에 관계없이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모든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는데 그래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미 십자가에서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죄를 짖고 “나를 용서해주세요!” 나는 이미 용서하였다. 그러면 고백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백과 죄사함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사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는 이미 하나님께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가르치면 큰일 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결코 죄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하게 할 것입니다.
3)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거나 멀리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전 6:17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내가 지금 저쪽으로 옮겼는데 주님은 어디계십니까?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어딜 가든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항했습니다. 29살이었고 사역에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주먹을 하나님 앞에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내 등을 돌리고 걸어갔습니다. 화가 나서 아주 멀리 갔습니다. ‘내 열심있는 사역도 이제는 없습니다.’ 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내가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가려고 했습니다. 돌아보았을 때 한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온 길을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내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아직도 화났니?” “아니요 이제는 화 안내요.” “그러면 빨리 와 내가 안아줄게.” 오 신실하신주! 나는 신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멀리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인데 멀리 갈수 있습니까?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데 멀리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떤 성명서를 만들 텐데 이 성명서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에 대하여 화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화나게 할까요? 제가 사전과 컴퓨터를 화에 대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것을 줄치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것은 꼭 한가지 일로 분노하였습니다.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모든 이유는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절대로 화내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데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여러분의 죄에 대한 모든 분노가 거기에 쏟아졌습니다. 죄에 대한 사함을 주었을 때,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죄 때문에 분노하신 적은 없습니다. 죄의 대가에 대하여 고민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그 결과는 십자가에서 끝났는데 왜 고민합니까?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다시 생각을 바꾸어서 혼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는 끝났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죄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실망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실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망이란 기대치에 차지 않았을 때 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기대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때 실망하지 않습니까? 나에 대하여 실망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해 실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실망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럴 줄 정말 몰랐다”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살다가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너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알고 있었어. 그러나 나는 너를 선택했어.” 많은 믿는 자들이 정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언짢아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정죄하고 책망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느낄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망을 주실 때는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이것을 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망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의 죄를 용서받았습니까? 모든 죄. 그런데 왜 밖에서 죄인처럼 삽니까? 성자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처럼 사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과 영생에 대하여 감사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요1:12 그는 나를 그의 가족으로 불렀다.
요15:1-5 그는 나를 그의 친구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요15:6 그는 나를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선택했다.
행1:8 그는 나를 증인이 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롬5:1 그는 나를 용서했고 의롭게 만들었다.
롬6:1-6 그는 나를 죽음의 죄의 힘에서 일으켰다.
롬8:1 그는 나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고전1:30 그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했다.
고전2:12 그는 나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래서 나는 그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다.
고전6:19 그는 그의 값으로 나를 샀고, 만들었다.
고후1:21 그는 나의 상속할 유산으로 성령을 주셨다.
고후5:17 그는 나로부터 새로운 인격을 만들었다.
갈2:20 그는 나의 소중한 삶이 되었다.
엡1:3 그는 나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엡1:4 그는 내가 새롭게 태어나기 이전에 나를 선택했다.
엡1:5 그는 나를 그의 양자로 택했다.
엡1:7-8 그는 나에게 그의 은혜를 아낌없이 주었다.
엡2:5 그는 나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엡2:6 그는 나를 일으켰고,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엡2:18 그는 나를 성령을 통하여 그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빌3:20 그는 나에게 천국의 시민이 되게 하였고, 거기에 그와 함께 앉도록 하였다.
골1:13 그는 나를 어둠으로부터 빛의 왕국으로 옮겼다.
골1:14 그는 나의 생애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
골2:7 그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였고 그의 위로 자라게 했다.
골2:10 그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였다.
골2:11 그는 나를 원죄로부터 구속하였다.
골2:12-13 그는 나의 옛사람을 장사해버렸고, 새로운 사람으로 나를 일으켰다.
딤후1:7 그는 나에게 성령의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셨다.
딤후1:9 그는 나를 하나님의 사역의 한 부분으로 만드셨다.
히2:11 그는 나를 성화시키셨고, 그의 형제라고 불러주셨다.
히4:16 그는 나에게 그이게 나아가는데 담력을 주셨다.
벧전2:5 그는 나를 살아있는 돌로 만드셨고, 그의 영적인 집에 한 부분이 되게하셨다.
벧전2:9 그는 나를 선택된 족속, 특별한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벧후1:4 그는 나를 대단히 위대한 사람과 거룩한 나라에 동참하게 될 귀중한 약속을 주셨다.
요1서1:9 그는 모든 불의로부터 나를 계속적으로 깨끗케 하셨다.
요1서5:18 그는 나를 사탄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신다.
은혜의 영성
제6과 승리는 선물입니다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승리는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그분의 삶을 사시도록 할 때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5장4절)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가동되는 전능한 “발전소”를 우리 안에 갖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영적 축전지를 충전해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셀교회 지침서는 제가 목회하는데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안 후에 이 사실을 어떻게 나눌까 고민하였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 프로그램을 나누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민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서 이 진리를 나눌 수 있을까요? 잡지를 보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책이 너에게 답을 제시할 것이다. 그래서 랄프 네이버가 쓴 셀교회 지침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나서 회중에게 이 책을 인용하여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셀교회가 얼마나 성경적인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나서 6개월 후에 셀교회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듯이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메시지가 필요하고 성경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성경적인 메시지가 방법이 없으면 들려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메시지가 없고 방법이 있다면 거기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메시지는 성경적인 메시지이고 나누어야만 하는 메세지입니다. 셀들이 율법주의에 빠진다면 셀들은 암에 걸린 것입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큰 고민과 문제는 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였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미 존재했던 율법주의에 관해 쓴 것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율법주의에 빠지는 교회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한 서신입니다. 풀정 목사님이 엔씨디를 통하여 많은 책들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빌 길햄이 쓴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에 대한 책도 있습니다. 다른 책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에 관한 성경적인 정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을 여러분의 진리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더 신사적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더 신사적이었는가 하면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 왜 그런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저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신학교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 중에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이 성경 안에 있으면 성령을 초대하여서 여러분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신분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을 때, 제가 이미 준비했던 훌륭한 설교를 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 설교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성숙되는 데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새로운 메시지가 아닙니다. 처음 이 메시지를 들었을 때는 새로운 메시지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만 새롭게 들려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많이 받아들여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것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체계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거부합니다. 현실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너무나 작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베뢰아의 사람들처럼 성경을 매일 연구하여야 합니다. 율법에서 자유한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나에게 계시하였을 때 저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 가 보아도 이 메시지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습니다.
셀에서는 두 가지를 꼭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신분과 율법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대하여 배우고 율법에서의 자유에 대하여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됩니다. 율법에서의 자유만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배우지 않으면 그들은 방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으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방종으로 갑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이가 복음을 정확히 전한다면 내가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라.’ 어거스틴이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해도 될까요? 이런 사람을 청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를 할 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루터 선생님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마틴 루터가 대답하길 “내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너에게 묻고 싶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 이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주고 계십니다. 성경에 근거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면 가서 교인들을 종교에서 해방시키십시오. 율법주의에서 해방시키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의 손 안으로 인도하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1. 죄의 권세
만약에 믿는 자들이 이미 완전한 의를 성취했다면 왜 아직도 죄를 범합니까? 신분을 확인한 이후에 완전한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를 안 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믿는 자의 본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죄를 지을까요? 6과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육신 안에 있는 죄의 권세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1) 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긋지긋한 존재입니다.
먼저 육신 안에 있는 죄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아무도 죄가 없는 자처럼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새로운 자세가 있습니다. 죄는 믿는 자들에게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죄를 보면 그것은 튕겨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죄에 대하여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죄 안에서 먹고 마셨던 우리 자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거기에 대하여 반응을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율법을 중심으로 한다면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죄를 지을 것입니다. 삶의 스타일이 답답함과 절망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안에서 살 때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16-23)
① 죄를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성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을 보십시오. 죄가 강하게 튀어나가지 않습니까? 그는 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를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싫어하는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믿는 자가 죄를 싫어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고도 죄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 그것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당연한 듯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삽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께서 슬퍼하기 때문에 내적인 갈등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슬퍼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죄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합니다. 하루는 나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죄들이 내 안에 있고 그 죄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가만히 보니 자신을 증오하지는 않는군요? 전부 다 반대입니다. 자기를 증오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군요? 죄를 사랑하다고 하지만 죄를 미워하고 있군요?”죄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사랑할만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대한 것입니다.
②단지 죄가 즐겁기 때문에 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할 때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죄가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에게 성경구절을 알려주면서 죄가 어떤 즐거움을 가져오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여러분이 죄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③죄란 그리스도인이 육신을 따라 살 때 드러납니다.
죄는 믿는 사람이 자기의 육을 따라 갈 때 죄가 나타납니다. 육이 무엇입니까? 살 껍질은 아닙니다. 육의 개념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예수를 떠나서 우리가 채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지 않고 우리의 삶을 우리가 이끌어가고자(manage) 하려는 것이 육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기울여서 좋은 것은 최대화시키고 나쁜 것은 최소화시키려는 것이 육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내가 내 삶에서 그대로 사는 것이 육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죄의 본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가 행동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육 안에서 나타납니다. 죄의 근본적인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서 내가 사는 것입니다 육이라는 것이 흉하지 않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은 나의 노력으로 살려고 할 때 크게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독단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이 육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의 영은 누구인가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여러분의 영은 의롭습니다. 여러분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여러분의 새로운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육과 옛 자아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옛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육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갖고 있는 지식인데 예수 없이 독단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육을 자꾸 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 것인가? 육을 따라 살 것인가? 죄는 믿는 자에게서는 튕겨 나가게 됩니다.
2) 죄는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몸의 지체 속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죄는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지체 속에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속받지 못한 육신 안에는 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옛날의 영은 나갔고 새로운 영이 왔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혼도 예수 안에서 점점 더 성화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변화된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갖고 있는 몸은 변화된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가 우리 몸의 지체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지만 우리의 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우리 안의 죄와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나눕니다. 바울이 죄를 지었을 때 나는 악한자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
이제 죄를 짓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안 지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내 실수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죄를 지을 때는 그것은 본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7절에 ‘더 이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20절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하는 자가 내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는 죄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의 죄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우리를 죄 짓게 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욕심에 따라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우리의 본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자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한말을 기억합니다. 50먹은 남자가 ‘내가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많은 골을 넣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등학교에 있을 때에는 누구도 내 기록을 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도 운동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도 죄인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누구도 내가 살았던 것처럼 살 수는 없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아직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계속에서 당신은 성자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짓는 성자 성녀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된 동시에 타락하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두 가지 본성이 이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가지 본성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건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사도 바울은 자기가 악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이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분과 죄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바울이 어떻게 죄의 권세로부터 자신을 떼어 놓았는지 살펴보십시오.
–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 나는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 일을 행합니다.
–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이 내 속에 존재합니다.
– 나는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 악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 곧 내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 나의 속사람은 즐거이 하나님의 법과 일치합니다.
이 글을 보면 이 사람은 죄를 짓고자 안달하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가끔 죄에 물들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열정이 아닙니다. 어떻게 죄가 믿는 자 안에서 그렇게 오래 살 수가 있습니까?
죄의 권세는 생각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5)
저의 멘토이신 한 분이 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와서 속삭일 때는 처음에는 일인칭으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죄가 이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 죄가 들어오면서 목소리를 바꾸어서 내 생각인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 강대상은 크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작지? 내가 더 큰 강대상에 서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나에게 잘못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여야겠다. 그런데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되지.’
내가 서로 싸우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것이 아닌 생각이 여러분 안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생각을 통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떤 생각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주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내 것인지 주님의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답하기가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경건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원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불경건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경건한 생각이 여러분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보통 생각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저의 생각 중에 어떤 것이 더 경건한 생각인지 말해 보십시오. 부흥회에 내 아들을 데려 온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야구게임에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둘 다 경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경건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가라, 이것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생각하기를 ‘야구 경기보다 부흥회에 데리고 가야지’하고 야구장에 가지 않는다면 이는 불순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 거하면 그가 우리를 통하여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의 마음이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수를 범한다면 성령께서 실수를 밝혀주실 것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왜 죄를 짓는다고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마침이 된 구속사를 믿지 아니할 때에 죄를 범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게 될 때 육이 커지게 됩니다.
2. 죄를 이기는 능력
1)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6:1-7)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칭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1절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는다고? 이미 은혜가 우리를 덮어 버렸기 때문에 나가서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유혹받는 대로 살면 안됩니까? 아주 단순하지만 내 생각대로 살면 안됩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또 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을 때 그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우리가 죄를 이기는 권세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느 상태에 있는 가를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죄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죽음입니다. 죄와 연관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같은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율법과도 상관이 없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수긍을 하는데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두 가지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큰 길이 있는데 점점 더 좁아지는 길입니다. 이 큰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로워졌다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길이 좁아집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줄어듭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둘에 대하여 아무 것도 관계가 없습니다.
죄는 결코 우리를 지배할 어떤 권세도 갖지 않았습니다.
죄가 우리를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죄가 나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까? 죄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권세는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거짓말이 뭐라고 말합니까? “넌 아직 자유하지 않았어, 넌 아직도 묶여 있어.”
서커스에 가서 기둥에 묶여 있는 코끼리를 본적이 있습니까? 몇 톤이 나가는 코끼리를 묵어놓은 말뚝을 봅니다. 묶여 있다 할지라도 충분히 뽑을 수 있습니다. 코끼리가 새끼일 때 큰 나무에 묶어둡니다. 아기 코끼리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묶어 놓습니다. 코끼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묶여 있을 때에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음을 인식합니다. 코끼리가 아주 크게 성장해서 트럭이라도 끌고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코끼리는 아주 작은 말뚝에 묶여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코끼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는 말뚝과 줄이 코끼리를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서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죄는 여러분 안에서 더 이상 권세를 갖지 못합니다.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 있을 때에는 죄의 거짓말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하고 싶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조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치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2)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를 부단히 자기만족적 생활방식으로 끌어내리고자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한 구절에서 두 가지의 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죄와 사망은 율법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미 해방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 지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묶여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②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을 능가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 끌어내림을 이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한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아주 높은 빌딩에서 뛰어 내렸다고 합시다. 많은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질문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떨어졌는가?’ 입니다. 그 사람이 떨어졌으면 이것이 사실이기에 더 이상 이에 대하여 물어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뛰긴 뛰었는데 행글라이더를 탔다면 이 사람은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중력의 법칙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바람에 의해서 나는 법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다면 여러분은 중력의 법칙이 아닌 바람을 타는 법에 의해서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을 때 중력이라는 법칙이 없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중력은 있습니다. 중력은 계속 있지만 여러분을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죄가 우리를 끌어 당기려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할 때에 그것을 이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는 자유케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우리를 사망의 법으로 자꾸 끌어드리려 하는 죄를 이기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고 쉬십시오. 그리하면 그분이 이기게 하십니다. 그런데 행글라이더를 탄 사람이 행글라이더에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행글라이더를 놓는다면 그는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능력이 부여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꾸 떨어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마음을 그리스도께 집중시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죄를 생각하고 죄를 이기려고 합니다. 죄를 극복하는 방법은 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벌써 그것을 생각합니다. 죄를 생각하는 것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그 때 그 음식은 계속 머리속에 있습니다. 이런 죄를 다시는 짖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생각을 죄에 두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두어야지 죄를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1-3)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까? 위에 것에 두어야 합니다. 마음을 죄와 땅의 것에 두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육신의 생각을 한다면 사망의 생각을 한 것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잠23:7)
우리가 육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육에 두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 있습니다. 저는 한 때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매일 농구를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늦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저에게 금요일에 농구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저는 절대로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져도 농구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금요일에 농구를 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6살 때 교회에 갔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주일학교 뒤에 섰습니다. 그런데 저는 16살 때까지 여자 친구가 없었습니다. 제가 서 있는데 어떤 여학생이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저는 황홀하여 졌습니다. 그녀와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데이트를 한다면 아빠 차를 써도 되겠습니까?”“너 진짜 여자친구가 있어?” “아직은 아니지만 제가 데리고 나가고 싶은 아이가 있습니다.” “누군데?” “지난 주에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온 여자 아이인데요!” 아버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빠는 허락을 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그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 주차장에서 서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너 금요일 뭐하니?” “아무 것도 안해!”
“우리 금요일에 맛있는 것을 먹을까?” “좋아!” “할렐루야!”
그래서 금요일 날 그녀를 만나서 맛있는 것을 먹었습니다. 그날은 농구를 안했습니다. 그녀를 데려다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어!” “정말 그래!”
“그러면 다음 주에 또 만날까?” “ 그래 좋아.”
다음날 집에 있는데 친구가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친구가 대뜸 하는 말이.
“너 어제 어디 갔었어? 금요일에 농구하는 것을 다 알고 있잖아!”
“미안해 이제는 농구할 시간이 없어, 사실은 나 여자 친구와 있었거든”
다음 주 금요일에도 안 나갔습니다. 매주 금요일 마다, 3년 동안 농구안하고 그녀와 만났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19살에. 지금 내 나이가 46세인데 장남의 나이가 25살입니다. 저는 지금 금요일 날 농구했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여자 친구가 나를 농구에서 구원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지요? 그것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씨름하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고 그분을 안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다른 것들은 생각도 안납니다. 다른 친구들이 와서 너 뭐하는 거야. 어디 있었어 질문합니다. “저리 가. 나 바빠.”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라 세상 모든 것들은 그의 얼굴을 바라 볼 때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에 가서 죄의 능력을 이기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증거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아름다움을 증거 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랑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죄들이 조그만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그분을 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에 감사 할 뿐만 아니라 이 놀라운 주님과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은혜의 영성
제5과 율법에서의 자유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많은 그리스도인이 삶에 있어서 모순이 드러나는 까닭은 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율법은 “당신은 해야만 돼!” 라고 말하지만 반면에 은혜는“나는 하고 싶어”라고 말하게 합니다. 성경의 그리스도인의 경험들이 모두 율법에 기초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승리의 삶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의 신분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성취하여 얻는 승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거룩해지려는 시도는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님과 함께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목적하는 것은 우리의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끝장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노력하는 것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우리를 상한심령이 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상한 심령은 우리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본질을 우리에게 직접 주셨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만물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살아가신다는 것을 상상하여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내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설교하는 것이 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나는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합니다. 내가 나의 사역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사역하신다는 것은 복된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사역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사역하시는 것을 원합니다.’여러분이 열 번을 더 사는 것보다 주님은 하루 만에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항상 항복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나를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나를 통하여 행하시옵소서. 나는 그 결과에 대하여 주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결과에 대하여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확인하여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율법에서의 자유에 대하여 배우겠습니다.
1. 율법과의 결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의 해방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율법주의자로 태어납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는 우리가 영적으로 깊어지려고 한다거나 우리가 행한 바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삶의 체계를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7:1-4)
롬7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결혼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과의 결혼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결혼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율법과 결혼을 하면서 태어납니다. 율법씨와 결혼 생활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의 행위가 완전할 때만 좋아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우리가 잘하는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은혜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데 나를 인하여가 아니라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율법주의는 복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자꾸 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은혜 안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사랑이 행함의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것은 구약의 시내 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애굽기19:5)
만약에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옛 언약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 언약 밑에서 삽니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옛 언약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새 언약을 선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선포해야할 새 언약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옛 언약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 언약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얽어매었던 옛 언약은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옛 언약 밑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일한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건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하늘에 신령한 모든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율법과 결혼하였다고 착각합니다.
1) 우리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율법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는 분명히 율법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담의 죄 안에서 율법과 결혼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율법과 결혼 한 것입니다. 이미 아담 안에 인류의 씨가 있었기에 그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모두가 범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씨와 결혼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씨와 결혼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율법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아직 율법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사는 것은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항상 정죄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3:7-9)
바울은 율법을 죽게하는 의문의 직분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직분은 정죄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연관하여 생활하면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율법씨를 기쁘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쪽부분을 열심히 하여 만족케 하려면 다른 부분을 지적합니다. 율법씨가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항상 ‘더 더 더’를 말합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발견하기 이전에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을 때 사무실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 성경을 많이 일고 있느냐?” “예!”
“너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안하는 것이 이상하다.” “저 기도합니다.”
“성경을 읽는 만큼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읽는 시간을 조금 빼서 기도에 투자를 합니다. 그러면 율법씨가 와서 말합니다. “너는 모든 시간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 사용하면 사역은 언제하느냐? 너는 이상하구나 너는 교회를 사랑하고 있지 않구나!”
그래서 기도와 성경과 심방을 하는 시간을 쪼갭니다. 그러면 말합니다. “너는 교회 안에서만 일하느냐? 사회의 일은 아니하느냐?” “저는 사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래서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사역을 하고 사회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너는 왜 청소년들에게는 관심이 없느냐?” 이런 식으로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정죄를 당합니다. 이와같이 율법주의자로 사는 동안에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율법씨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율법주의로 사는 것은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어떤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늘 답답하고 고민하며 씨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렇다면 여러분은 율법씨에게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도록 결코 돕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서는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우리를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의사와 같이 병을 진단을 하지만 치료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열심히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다 기록한 다음에 기쁨이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답답하고 절망합니다. 종교적인 율법아래 사는 사람은 기뻐할 수도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승리를 주시려고 계획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옵니다. 그가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1)
성경을 많이 일고 기도를 하고 전도하고 심방을 많이 하면 승리가 올 줄로 생각하지만 승리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합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이유는 이미 승리가 우리 삶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원수가 와서 ‘너가 잘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속이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승리를 얻는 것이라면 승리의 찬양은 누가 받습니까? 내가 어제 기도를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예배가 영감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영광을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루 종일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너무나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맞아서 놀라운 일이 있어났다고 합니다. “네가 너의 일을 했다고? 그 결과로 너의 신용으로 받는다고?” “그래도 저는 열심히 했잖아요?”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느냐?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 못하느냐 그것은 너 자신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아니냐?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너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이 아니냐?”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인정해 놓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것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복주시기 원하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때에 복이 무엇을 해줍니까? 그 복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복음전도를 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설교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입니다. 나는 수년 동안 종교적인 법칙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나는 회중들을 종교적인 법칙 아래서 살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 이것, 이것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칙들은 그들을 경건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씨는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씨는 정반대되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7:5)
성경을 보면 우리의 죄성을 더욱 충동질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충동질 합니까?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이 충동질 합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설교를 하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는 죄를 지으라고 격려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이렇게 율법적으로 설교하는 줄 모릅니다. 율법은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율법은 여러분들을 망하게 합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박물관을 방분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강단이 있고 그 곳에 골동품과 같이 쇼파가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이 강단위에 올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강단이 이 가구를 놓을 정도면 내가 올라가도 안 부서질텐데. 그러고나서 올라갔습니다. 아내가 “무엇하는 거예요?”해서 내려왔습니다. 하 참 이상하다. 내가 왜 그 강단에 올라가고 싶어했을까? 그 경고문이 없었으면 올라가지 않았을 텐데.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제가 아틀란타의 기차역에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더 이상 그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선이 있었습니다. 안내문이 나오길 선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내 발을 보았습니다. 혹시 내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 세 명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발을 그 곳에 넣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냐하면 스피커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한번 해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율법 안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세우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율법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내 음성이고 내 말인데 원하느냐 그러면 가져라. 내 말을 듣고 싶다면 가져라. 이것은 선물이다 가져라. 그러나 악한 사단이 와서 이것을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님 보세요. 오늘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선물이요?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선물을 율법으로 만들어 꼭 읽으려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힘들어 집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라. 교통을 원하면 기도하라. 이것을 선물로 준다. 그러나 원수가 와서 이런 생각을 심어줍니다. 너는 꼭 기도해야 된다. 이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이것은 의무이지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율법주의만큼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교인 중에 위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어떻게 말해줍니까? 그가 아직도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의로워지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전혀 할 일이 없습니다. 의로워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가 나의 의입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그들로 인해서 의롭게 되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들을 가르쳐 줍니다. 이전에는 누가 나에게 와서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 저는 그에게 리스트를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이런 리스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의롭게 되기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습니까? 이런 행위와 일들은 의를 얻은 사람들의 삶의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구약의 유대인처럼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계속 노력하므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
2) 율법씨와 결혼했다는 것은 평생을 통하여 씨름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허망한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허망하게 의를 성취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0-32)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행진을 합니다. 의를 성취하려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라.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의를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의롭게 되기를 바라느냐? 내가 의니라.” “그러나 예수님 나는 바쁩니다.” 탐심하지 말라. 이 모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의다!” “예수님 비켜주세요. 나는 바쁩니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저 사람들과 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행하려면 기적이 필요합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거야. 기적이 필요한 거야. 나는 기적의 원천이다. 의를 원하느냐? 내가 선물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은 의를 받았는데 노력하지 않고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로 받으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결단코 받지를 못했습니다.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여기에 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고 얼마나 기도를 하여야 하고 교회에 얼마나 전도하고 전도를 얼마나 하고 헌금을 얼마나 하는가.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왜 믿는 사람들을 붙들어 놓고 괴롭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거룩하라고 합니다. 현대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기를 통과하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쪽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는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지금 행하고 있는 나쁜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은 남편이 된다는 것은 구원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교회를 가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행위를 깨끗케 하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 사역입니다.
“그래 너는 구원을 얻었어, 그러면 이제부터 교회에 꼭 나와야해 주일날도 나오고 수요일도 나오고 설교도 듣고 성경을 매일 읽고 기도도 매일하고 헌금도 해야 돼.” 모일 때 모이고 가르칠 때 가르치고 심방할 때 같이 심방하고 … 너무 피곤합니다. 혹시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받기 전에는 예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고 난 후에는 네가 해야 돼, 네가 해야 돼 하고 가르칩니다. 전에는 너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야, 은혜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의 행위야 너의 행위야 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너 스스로 해야 성장한다고 가칩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난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전도해 와라, 성경을 읽어라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성경을 너무나 읽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는 이미 기도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증거하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복음을 전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망쳐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하고 싶은 일들을 우리가 너무 하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의 기쁨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로 빠집니다.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가르치십시오.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가르치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살고 싶어하시는지를 가르치십시오. 그 다음에 성경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바로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여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한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계명들은 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영원토록 흘러나오는 상태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을 지키게 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한 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랑이 저의 아내입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합니다. 저는 2주 동안 나와 있는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해 주십시오. 아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와주십시오. 결혼생활의 법칙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주 만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에게 제가 키스를 해야 할까요? 제가 꼭 해야 할까요? 해야 된다면 어떤 키스를 해야 합니까? 볼에다가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심각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 분은 부부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키스를 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 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 안 해주어도 됩니다. 저의 부부생활은 규칙생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계입니다. 나는 내 심장이 열망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다면 교인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무한한 동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에서 나오는 데로 행동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경건의 삶입니다.
2. 은혜와의 결혼
은혜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되 더 이상 다른 어떤 일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되는 삶의 한 체계를 말합니다.
1)십자가에 의해서 우리의 율법과의 결혼은 끝이 났습니다.
은혜씨에게 결혼을 한다는 것은 율법씨와 함께 사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을 율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결혼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율법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생활은 죽을 때까지 갑니다. 문제는 율법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해방됩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해서 영원부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네가 나의 신부였으면 너무나 좋겠다.’‘나와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율법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해줄 텐데… 그런데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네가 죽으면 되는 구나. 너를 죽게 한 다음에 다시 태어나게 해서.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서 나와 결혼을 하면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은혜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율법씨와 결혼을 하였던 옛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4)
때때로 율법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와의 결혼생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율법과의 결혼생활이 끝난 것입니다. 믿는 자는 율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1)믿는 자는 율법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율법과 결혼을 하였습니까? 율법과 결혼한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까? 율법과 결혼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은 지금도 건강하게 살았지만 여러분은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더 이상 종교의 규칙 밑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의롭습니까?
2) 율법은 살아있고 훌륭하지만 이상 우리와 관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딤전1:9)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누구를 위해 온 것 입니까? 불의한 자를 위해 있습니까? 여러분 불의한 자입니까? 그러면 율법은 여러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우리는 은혜와의 결혼으로 연합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은혜와의 결혼에는 놀라운 기쁨이 넘쳐납니다. 은혜는 우리를 절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 왜 오늘 더 기도하지 않았니?’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만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니?’ 하고 화내지 않습니다.
2) 십자가에서 우리는 은혜와의 결혼으로 연합되었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결코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은혜는 우리와 함께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은혜는 의를 결혼의 반지처럼 줍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기독교인의 삶은 테스트 시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식, 쉼입니다. 물론 시험은 우리에게 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100점을 맞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의 결혼은 우리에게 평생 동안 평안을 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28-29)
3)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혼은 삶의 휴식을 제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씨름은 끝났습니다. 그와 함께 안식하십시오. 안식하는 것조차도 의무가 아닙니다. 그저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율법씨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율법과의 과거를 자꾸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은 새롭지만 죄는 과거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옛날 일을 생각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자꾸 혼동합니다.
3. 영적인 간음의 상처
“예수님 감사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 드릴까요?” “내 사랑을 그저 받아라.”
“감사합니다. 무엇을 해드릴까요?” “그냥 받기만 하라.”
사랑, 좋습니다. 주고 받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나의 사랑을 받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충분히 섬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내 사랑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이미 나 중심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받는 만큼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더욱 주님을 사랑하도록 해 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만큼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이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과의 관계가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점을 다른 데로 옮깁니다. 다른 데를 쳐다봅니다.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살아 있습니다. 그는 친구를 찾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찾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신분을 모르는 자는 시선을 그에게서 옮겨서 율법씨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세요. 물론입니다. 신분을 망각하는 자는 예수님의 신부임에도 율법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한다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간음입니다.
1) 영적인 간음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간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규칙을 위주로 그의 생활을 세워나갈 때 이루어집니다. 저도 교인들에게 종교의 규칙들을 요구했었습니다. 계속 이런 규칙들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설교합니다. 이런 설교는 목사님들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이런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교인들이 방종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은혜의 이야기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교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죄를 많이 짖고 있는데. 그러나 은혜가 사람에게 절대로 죄를 짓게 하지는 않습니다.
2)영적인 간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규칙들을 위주로 그의 생활을 세워나갈 때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2:11-12)
은혜가 사람들로 죄인의 삶을 격려하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불경건한 것들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교인들에게 은혜를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종교적인 규칙들을 가르친다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인 기도를 말하면 이것이 율법이 됩니다. 결과는 기도를 싫어하게 됩니다. 성경 읽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말하십시오. 성경을 읽고 싶어 할 것입니다. 교인들을 해방시키십시오. 예수님이 주신 것은 해방입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담임목회를 할 때, 나는 이해가 되는데 교인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 어떤 사람들은 남용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가르침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몇 사람은 남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독교인은 남용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오고 회개함으로 주님 앞으로 나올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자유와 해방을 가르칩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 규칙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4.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미국의 문제의 유일한 답은 십계명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쓴 사람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문제의 답은 십계명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국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님이십니다. 규칙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주셨을까요?
1) 율법의 하나님의 거룩함의 외적인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의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으십니까? 율법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을 볼 수 있습니다.
2) 율법은 죄를 자극합니다. 율법이 죄를 자극한다면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저는 율법을 주신 이유가 죄를 짓지 말라고 주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5:20)
율법이 왔는데 이는 죄를 더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왜 증가시키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를 더 증가시켜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롬5:20절의 말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설명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죄를 증가시키는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3) 율법이 와서 죄를 승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콜라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막고 흔든다면 콜라가 솟구쳐 나올 것입니다. 엄지손가락이 콜라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흔들었다고 콜라가 창조가 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콜라를 흔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불의한자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영적으로 잘못되어서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를 자극하여서 믿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답답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죄를 보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미 믿고 있는 자는 이런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믿는 자도 답답하고 절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을 초청하여서 이런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간음했던 죄에 대하여 회개하십시오. 율법과 함께 했던 삶을 자백하십시오. 그리고 교인들에게 율법과 간음하였던 삶을 회개하게 하십시오. 그리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십시오. 율법에서 떠나서 모든 사랑을 오직 주님께만 돌립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해 기도합니다. 율법주의에서 자유하고자 합니다. 정죄에서 자유하고자 합니다. 자기 비하의 정죄에서, 처참하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는 거짓말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는 압니다. 이제는 주님께 나갑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율법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잘가라. 잘가라!”
주님 우리는 주님의 품안에 안기길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영원토록.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선포를 원합니다. 능력으로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
<당신은 율법으로 삽니까? 아니면 은혜로 삽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말합니다. 은혜는 말합니다.
당신은 해야만 한다. 반드시 꼭 나는 원한다.
율법을 잊지 말라. 나는 나의 관계성 속에서 쉬고 있다.
그것은 당신의 의무이다. 그것은 나의 바램이다.
당신은 당신의 행위를 개선시켜야 한다. 나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증진시키기를 원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의무가 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길 특권을 가지고 있다.
원리를 중심으로 당신의 삶을 세우라. 나의 생명은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당신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공급 속에서 쉼을 선택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바쳐야 한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포기할 것이다.
당신의 확신들에 의해서 살아라. 나는 주님의 내주하심에 의해서 산다.
당신은 경건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나는 거룩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본래 모습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
당신은 죄에 대해서 싸울 필요가 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승리를 위해 싸워라. 예수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나는 승리한다.
열매를 생산하라. 나는 단순히 예수 안에 거함으로 열매들을 생산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권리들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힘은 나의 연약함 속에서 보인다.
예수님을 위해 어떤 것을 하라. 나는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살도록 할 것이다.
당신은 더 나은 자기 이미지가 필요하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안다.
당신은 단지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은 죄인이다. 나는 예수님의 본성을 나누어 가진 성도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실망했다.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시고 전적으로 나를 받아 들이셨다.
(질문과 답변)
질문: 골3:3에서는 우리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5절에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하지 않습니까?
답변: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사는 것은 이미 죽은 사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어에 보면 여러분의 지체가 죽은 것처럼 여겨라 하고 말합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영어성경과 와 한국성경이 많이 다릅니다. 생명체는 몇 번 죽습니까? 죽었을 때는 죽은 것입니다. 한번 죽고 난 다음에 안 죽었으면 좋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5절의 죽이라고 한 것은 죽은 것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수표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죽음입니다. 이 현찰을 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을 죽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은 매일 확인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미국에 가면 개인이 쓰는 수표(Check)가 있습니다. 현찰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체크를 이용하여 사용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체크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체크를 현찰로 받아서 매일 쓰는 것, 받아서 죽었지만 매일 매일 쓰는 것은 바로 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한번 죽고 나서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즉 죽은 상태로 계속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질문2: 고전3:1에서 분열이 있는 교회를 어린아이와 같이 대함과 같이 하노라하고 너희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변: 육과 옛사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옛 자아는 죽었습니다. 육은 옛날 것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나의 신분을 옛날식으로 쓸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 받은 영의 신분은 육을 조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질문 3: 근본적으로는 의인이지만 발을 씻는 작업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용납을 기초로 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질문4: 인간의 본질에서 영과 혼 지정의의 정의와 상호작용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답변: 저는 3분설을 믿습니다. 어떤 이는 2분설을 믿습니다. 2분설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눕니다. 혼은 지정의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개성입니다. 영은 나를 밝혀주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입니다. 우리에게는 혼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혼과 영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분설과 삼분설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살전5:23절에서 3가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음을 말 할뿐입니다.
우리의 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거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혼으로 흘러 들어가서 몸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물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혼은 차와 같습니다. 녹차 홍차 인삼차 등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개성들이 있습니다. 영과 혼의관계는 물이 있는데 여러 가지 차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차는 물이 있어야 만이 차가 됩니다. 티백을 빨아먹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저는 한가지의 개성, 한가지의 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맛의 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은 육과도 반대가 되고 영과도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혼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것이 영으로 나타나지 아니할 때에 우리의 육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각과 마음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뇌와 마음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시체는 뇌가 있지만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가다가 원치 않는 것도 뇌 속으로 받아들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도 뇌는 컴퓨터처럼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을 걸러서 행동하게 합니다.
질문: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은 우리가 너무나 무거운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라는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짐은 가볍고 멍에는 쉽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지만 그가 같이 집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죽은 우리의 자아,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아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라고 해서 고난만 당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진다는 것은 이미 죽은 십자가의 사건을 현실에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둘이서 함께 연합하여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그 죽었던 삶을 연장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믿기를 예수그리스도가 이제는 부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질문: 살전5:16-이하의 말씀은 온전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죽어가는 자아를 보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답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지만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과 행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너무나 고통스런 나머지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행복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내 기쁨이 충만하게 하소서.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 안에서 행복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갇혀있던 바울이 상황은 안 좋았지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감옥에 있는 것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5년 전에 제 아들이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떨어졌는데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등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는 5군데서 피가 났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의사는 이 아이는 살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산다 할지라도 걷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뇌가 거의 망가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갔을 때에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응급차로 다른 병원으로 옮길 때 차 안에는 나와 아내가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우리는 울었습니다. 병원에 거의 도착할 때 쯤 내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한 가지 동의해 주시오. 오늘사건이 어떤 결과로 나올지 모르지만 하나니은 변함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 안에서는 슬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도 다른 사람은 우는 데 기뻐한 척 합니다. 천국에 갔으니 나는 기뻐요. 잘됐네요. 주님 앞에 갔으니까! 이야기하는 내용은 맞지만 그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상황 속에서 불행을 느끼는 것은 괜찮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꼭 울어야 돼’하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녀는 많이 울 것입니다.
질문: 교회의 리더 가운데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는데 계속 리더로 세워야 합니까? 본인도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답변: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무슨 일인가를 분명히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 전체 안에 있는 리더들이 한 가지 잘못하는 일 때문에 리더를 그만두게 된다면 몇 명의 리더가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가 없는 자가 돌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일어나 보십시오. 때때로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은혜를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은혜는 사람들을 대하기 쉽게 만듭니다. 나는 나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육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돌을 안 던질 것입니다. 지금 죄를 짓고서 나는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어, 회개할 것이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담대하며 계속 그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 교만한 자세가 있는 사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완전히 다른 경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거부하고 거역하는 영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리더쉽에서 그 사람을 제외하는 것이 더 났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교회에서 리더 중에서 죄가 없는 사람을 살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목사를 하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리더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정죄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그리고나서 나를 바라보고 그를 바라보십시오.
질문: 완전한 은혜와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이후 율법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변: 율법과 우리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인데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율법과 관계가 있던 그 사람은 이제 완전히 죽었습니다. 율법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율법과 관계를 갖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질문: 목사님의 신학적 노선은 엠.알.디한의 세대주의와 같은 입장인가?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 3 용도는 기도하고 싶다고 했는데 물론이다. 그러나 기도에 힘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칼빈의 제 3 용도는 사회를 관할하는 한 용도로서 이 말이 맞습니까?
답변: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과속을 안 하고 절대로 어지러운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휴지도 안 버립니다. 은행도 털지 않습니다. 싸움도 안합니다. 돈도 훔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모든 율법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저의 할아버지인데 그분은 법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율법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도적질은 안하고 간음을 안 한다면 내가 탐욕을 안 품는다면 나는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내 삶을 성경에 의하여 평가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을 따르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의와 반대되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면 죽은 것이지 다시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율법반대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주의자가 아닙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딤전 1:9)
저의 신학은 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신학의 위치를 말씀드립니다. 개혁주의자가 설교를 할 때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것에 대하여서는 잘 설교를 하고 성화에 와서는 흐트러지는 것을 봅니다.
질문: 예수님은 율법은 완성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답변: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만이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분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는 분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율법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완성하셨고 그리고 그가 내 안에 계십니다. 내가 율법과 빚졌던 모든 것들이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을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다 라고 합니다.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마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끝났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