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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과 옛 사람의 죽음 | 은혜의 영성 – 스티브 맥베이

    은혜의 영성

    제4과  옛 사람의 죽음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질을 얻었다면 옛 본질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개성이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변한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의 본질이 완전히 변화됨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옛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1. 옛사람은 아담에게 물려받은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1) 영적으로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죄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언제 죄인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영적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죄인입니다. 아담 안에 이미 우리가 존재하였기에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이미 죄인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아버지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유전자가 이미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할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셨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존재할 수 없습니다. 5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내가 죽은 것이요, 우리 아버지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유전자적으로 그 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나도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볼 때 아담이 태초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불복종하였을 때 이미 우리도 그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처음 범했을 때 비로소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첫 번째 죄를 지은 이유는 우리 본질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궁 안에서 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거짓말을 할 줄 압니다. 거짓말을 어디서 배웠다는 말입니까?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 아이들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이 받은 죄의 씨앗은 나에게 받은 것이고 올라가서는 아담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거짓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장남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그를 낳고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오고 그 아기를 우리 침대에서 같이 재웠습니다. ‘이제 아이를 자기 방에 두고 우리 둘이서 자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아기 방으로 옮겼습니다. 우리가 아기에게 허리를 숙이고 잘 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침실로 돌아와서 자려고 하는데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침대에서 떨어졌나? 나무 사이에 머리가 끼었나? 아내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갔습니다. 엄마를 보자마자 웃었습니다. 아이가 울었던 것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기는 거짓말쟁이!” 4명의 자녀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스스로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합니까? 어떻게 이런 것을 배우죠? 우리가 죄의 본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죄의 본질로 태어납니다.

    2) 성경은 우리가 지옥에 갈 운명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이 되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아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날 때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 일도 할 일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지옥에 갑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지었을 때 이미 우리는 지옥행으로 낙인이 찍힌 것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5:18)

    우리는 한 사람의 범죄로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3:17)

    그분은 이 세상에 왔고 그는 정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고 정죄를 받게끔 되어있습니다.

    3) 우리가 믿고 거듭나기 전에 우리는 죄악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질이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2:1-2)

    성경은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왜 죄인들이 죄를 짓는 줄 아십니까? 본질상 죄를 짓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죄가 없게 하자’라는 구호를 만듭니다. 그래서 알콜 중독자에 걸린 사람을 구원해 보려고 합니다. 마약 중독자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는 이러한 사람을 정화하여서 사회를 깨끗케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걸레를 가지고 해변에서 모래를 닦아내는 것과 갖습니다. 죄인들로 죄를 못 짓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서 죄를 멈춘다 하여도 그에게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들은 이미 지옥에 갈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죄를 범하든지 안 범하든지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사람들은 나쁜 일을 했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담 안에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이러한 본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죄의 본질이 우리의 삶을 컨트롤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의 심장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벗게 하고 회개케 하셨습니다. 얼굴을 돌려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를 행하셨을 때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강대상이 천국이라고 생각합시다. 지금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쪽은 영원히 흘러가는 곳입니다. 앞으로는 영원토록 올 것입니다. 시간은 여기서 저기 까지가 끝입니다. 하나님은 강대상에서 한눈에 보십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났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매일 매일 삽니다. 운전하고 가면 건물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가고 결혼하고 아들을 나고 네 번째 아이까지 낳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거지? 저 앞에는 내 죽음이 있겠지요. 나는 시간 안에서 삽니다.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구원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잡으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알고 계신데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가져가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나를 십자가에 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 아담 안에 있었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내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나의 죄인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1)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부활하였을 때는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장사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가졌습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 나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5:17)

    그래서 예수가 죽었을 때 나의 옛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 있었던 삶에 대한 죄의 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완전히 죄악성, 타락성은 십자가에 갔습니다.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손안에 계란이 있습니다. 이 계란을 인큐베이터에 가져갔습니다. 이것은 비정상입니다. 이 달걀의 껍데기를 우리의 몸이라고 합시다. 내용물을 마음이라고 하면 하얀색은 혼이고 노란색은 영이라고 합시다. 이것이 깨어진다면 비정상으로 태어납니다. 이 노란 것이 닭의 생명입니다. 만약에 내가 안에 들어가서 비정상이었던 그것을 주사로 다 빼어냈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주 건강한 노란자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닭으로 태어나겠습니까? 다른 것입니다. 안에 있는 노란 생명을 새것으로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변화된 닭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변화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닭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여러분의 죄악된 옛사람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영을 집어넣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옛 자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러분의 뇌는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옛 자아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옛사람이 죽었다면 왜 나는 죄를 짓습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옛 자아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로마서6:1-3)

    우리가 어떻게 옛 자아가 죽었는데 죄를 범합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연합하여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였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갈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몇 사람이 같이 죽었을까요? 예수가 있었고 강도가 둘 있었고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우리의 죄만 십자가로 간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간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6:6)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3)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죄의 본성이 죽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한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의 본성입니다.

    2) 지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가지 본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된 생명입니다.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오직 한 가지 본성만이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의 본성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설교에 이런 예화까지 썼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오래된 한 마리를 굶기고 새로운 개에게는 기도와 성경과 다른 것을 먹이면 그 개를 이길 것입니다. 만약에 옛 개에게 자꾸 먹이면 새 개를 이길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할 때는 듣기는 좋았지만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도 설교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배운 것을 설교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전통을 설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길 원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옛사람의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한 가지 본성만이 있습니다. 본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가장 기초되는 성질입니다. 이 강대상의 본질은 나무입니다. 이 성경책의 표지의 본질은 가죽입니다. 본질은 기초적인 성질입니다. 이 컵은 가죽 컵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이도 되고 동시에 가죽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의로운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사람의 본질은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거기서 무엇이 죽었습니까? 성경은 무엇이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혼인 개성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 육체가 살아있는데요? 바울의 개성이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죽었다는 것은 옛사람을 말합니다. 영을 말합니다. 죄를 지었던 나의 본성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이라고 합니다. 육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여서 비참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사도행전17:28)

    그가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3: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빌1:21절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3) 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십자가로 인하여 제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안에는 두 가지의 본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집안에 두 명의 주인이 있으면 망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 세력이 한 집안을 못 세우는데 두 세력을 우리 가운데 남겨놓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의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의 본성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한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우리의 죄된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죄는 완전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절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매일 마다 왜 죄를 범하는가를 언젠가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개처럼 짖을 수 있습니다. 한국 개는 한국말로 짖겠지요? 멍멍멍. 미국 개는 바우 바우하고 짓습니다. 나는 한국 개처럼 멍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멍한다고 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개처럼 행동할 수 있지만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인처럼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로새서2:11)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표시입니다. 어떤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점은 절대로 스스로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중의 하나는 언약의 할례인데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이상 육에 대한 할례가 아니고 우리의 영에 대한 할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오셔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곳까지 찾아가십니다. 여러분의 옛 본질 그것을 잘라버립니다. 완전히 떼어냅니다. 떼어낸 것은 결코 다시 여러분에게 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떼어 내셨고 그것은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약을 너무 많이 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의 죽은 시체가 장례식장에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가 와서 죽은 친구를 보았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으로 가서 마약을 꺼내서 말합니다. “일어나 여기 마약이 있어 얼마나 좋은 것인데 아무도 안보니까 한번 해봐!” 그 친구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먹어봐 순수한 마약이야! 이 친구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빨리 코로 마셔.” 만약에 죽은 시체가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야 너는 바보냐? 나 죽었단 말이여” 죽은 시체는 마약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마약에서 자유합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죄의 능력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마약이 있고 술 마시는 장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청소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더 이상 죄는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죄는 여러분의 삶 속에 엄청난 능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은 이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더 이상 그 죄의 능력은 여러분 안에서 능력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인하여 여러분은 싫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줄 알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꼭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싫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에 선택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선택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그는 죄의 종입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새로운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혹시 마약에 손대신 적이 있습니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음란했습니까? 혹시 알콜 중독이었습니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직도 그래’라고 하면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린도전서6:9-11)

    여러분은 의로우십니까? 불의합니까? 여러분은 의롭습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가 행하는 일을 적어 놓았습니다.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술 취한 자 등이 나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었습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여러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 더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뒤로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씻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구별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의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옛사람은 더 이상 여러분이 아닙니다. 그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창피함은 가버렸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 대하여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2. 옛 죄인은 죽었고 새로운 성도가 태어났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 성경구절을 읽었습니다. 그 때 암스텔담의 한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집회 중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더니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계속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는 웃다가 울다가하면서 설교를 방해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형제님 무슨 일입니까?”

    “지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서 주정뱅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른 삶입니다.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인식했을 때 새롭게 창조된 자아를 찾았고 기뻐했습니다. 옛사람의 본질은 죽었고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회심하기 전에 술 취한 자였습니까? 술 취한 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도적한 사람, 남색, 탐색한자 는 다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사람들 보다 더 타락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알콜 중독자가 될 수 없고 간음하는 자가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무슨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아직도 그렇게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알콜 중독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알콜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중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본질이 중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마치 자기가 아닌 다른 인생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본성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탄생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왜 우리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육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을 가정하려고 할까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이름은 스티브고 알콜 중독자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뒤에 4년 3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치료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알콜 중독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간음을 하였다면 간음이 그 사람을 간음쟁이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행동을 바라보고 그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는 행동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아주 좋은 복음의 소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씻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구별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의롭다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의 죄는 십자가에서 도말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1)새로운 사람은 아담의 가계가 가진 특성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 본성이 태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삶은 아담 안에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구분됩니다. 우리는 아담과의 관계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타락한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죽어버렸습니다. 나는 사람의 전적인 타락에 대하여 믿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태어나면 전적으로 타락된 상태라고 믿습니다. 무엇이 방금 태어난 아기를 타락한 아기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옛사람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그 본성을 십자가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본성은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전적인 타락이나 전적인 의를 믿어야 합니다. 전적인 타락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전적인 의를 믿습니다. 완전히 타락한 사람도 선한 일을 합니다. 선한 일을 했다고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아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구원 이후에 완전히 의롭게 된 사람이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완전히 의가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로서 더 이상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전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적으로 의로울 수밖에 없는 본성입니다.

    저는 개혁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와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좋은 교리를 갖고 있으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타락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로운 본성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옛 본성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죽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살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소유했는데 그가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교적인 율법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삶을 통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은혜에 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의 특성들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새로운 창조는 예수로 인한 완전한 의입니다.

    ① 완전히 의로운 본성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시편11:4)

    시편11편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왜 여호와의 전이 거룩하다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3:5)

    왜 모세가 섰던 땅이 거룩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거룩합니다. 고전3:16,7에서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데 여러분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살고 계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었고 지성소는 하나님의 침실이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한사람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깨끗케 하기 위한 여러 절차를 걸쳐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치장하고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누가 그를 만지면 그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가려면 완전히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입는 예복이 있습니다. 밑에 보면 줄이 달려 있고 거기에는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거기 안에서 지성소에서 섬김을 할 때 밖에서는 방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방울 소리가 나는 동안 모든 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안 들리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완전히 거룩하게 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누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은 죽어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할까? 네가 들어가 봐! 아니야! 네가 들어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의 발목에 밧줄을 메어서 들어가게 합니다. 죽는다면 밧줄로 끌어냅니다. 하나님 임재 안으로 얼마나 거룩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지성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웃이 없는 곳에서 계시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 성막에 있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분은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거룩하게 만들었는가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와 사시는데도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주 의로운 것입니다.

    ② 은혜 안에서 사는 자유

    이제 예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 안에서 살 권리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5:1)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까? 우리가 자유케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율법을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삽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의무가 아니고 자의적으로 원하여서 가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삽니다. 여러분은 의로우십니까? 그리스도인이 몇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전에 갖고 있던 본성을 어떻게 되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매일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왜 우리가 죄를 짓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성이 죽었다고 느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 죄성이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이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본성이 습관적인 죄악의 삶을 더 이상 살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과 영의 갈등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죄를 짓든지 짓지 않든지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새로워진 당신은 죄에 대해 저항하려는 욕구를 자기고 있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5과에 보면 율법에서의 자유를 다룹니다. 어떻게 유혹을 이기며, 우리는 한 가지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왜 죄를 짓는가에 대하여 다룹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개념에 배웁니다. 은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은혜아래 있는 우리가 성경 공부 등의 사역에 대하여 어떻게 조명해야 합니까?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질문1 : 찰스 스탠리의 성령 충만한 삶과 목사님의 은혜의 강의에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답변 :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성령 충만한 삶과 저의 가르침은 거의 비슷합니다. 저는 이 신분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스탠리 목사님은 삶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2 :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우리는 의로운 백성입니다}를 설명할 때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더 이상 한국인이 될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한국에서 태어나도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인의 문화 등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런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되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 연합함으로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기도하고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무엇이 동기가 되는가 입니다. 내가 율법주의에 있을 때에는 나는 이것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성경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행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신다고 말하는 구나! 율법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은혜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가 연합하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에게 반응했기에 성령께서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질문3 : 의에 대한 개혁교회 전통적인 개념인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의에 대하여 비교하여 말씀해주십시오.

    답변 : 율법의 관점에서 의를 보는 것에 대해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접근방법입니다. 옛 언약의 접근 방법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나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에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 율법적인 행위에 의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너희가 이렇게 행동해야 의롭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혜는 이미 너는 의롭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작년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내 옆에 23정도의 흑인 여자와 오른쪽에는 유태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흑인 여자가 나는 침례교인데요. 당신은요? 나는 유태인입니다. 그럼 우리는 비슷하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태인 랍비가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면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유태인으로 믿는 의는 모세 오경에 나타난 모든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기독교 교단에 속해있지요. 기독교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분만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면 예수님의 생명에서 본성을 찾기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잖습니까? 저는 침례교 여자를 보고 유태인 랍비를 보았습니다. 이런!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구원받지 못한 유태인이 구원받은 사람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구나!

    질문4 : 은혜 안에서 예수님이 내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시는 것은 내가 최선을 다 한 후 자신의 깨어짐을 통하여 찾아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지금이라도 찾아오는 것입니까?

    답변 : 여러분이 최선을 다했다가 절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대부분은 최선을 다하고 망해보지 않고서는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서는 알콜 중독에 걸리고 나서야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망가졌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망가져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안해도 됩니다. 그런데 도움은 됩니다. 지금도 받을 수 있습니다. 깨어짐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5: 내 의지로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목사님의 경험을 따라서 이야기 해 주십시오?

    답변: 예수님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따라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인도해주실 것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가 무엇이든지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실 지 다른 것을 주실지 모르지만. 십대의 아이들이 와서 “나가서 밥을 먹을 거니까 20불을 주세요!” 하면, ‘너희들은 나가서 밥 먹을 수 없어’라고 말 할 수도 있고, ‘나가서 먹고 와라’하고 말할 수도 있고. ‘20불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10불만 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기도할 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혼동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유혹에 따라 살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깨어짐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증명하길 원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성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본성임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옛 본성을 십자가에서 못박았습니다.

  • 제3과 완전히 새로운 나 | 은혜의 영성 – 스티브 맥베이

    은혜의 영성

    제3과  완전히 새로운 나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깨어짐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입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갖고 있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고난과 깨어짐을 같은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고난은 깨어짐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수는 있지만 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깨어짐은 나의 삶에서 나의 손을 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하시고 자 하는 모든 것에 권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발견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5:23)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은 세 가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 안에 3위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3등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시간과 공간으로 받아들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르지만 모여서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공간도 높이, 넓이, 깊이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모여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실 때 3등분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사람을 3등분으로 만들었습니다.

    1)인간은 육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몸을 봅시다.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 고 있는 곳입니다. 몸은 여러분이 아니라 집일뿐입니다. 언젠가는 이 집에서 나갈 것입니다. 성경은 몸을 집이라고 합니다. 이 몸을 통하여 세상과 연관하고 있습니다. 촉감, 시각, 후각, 미각, 청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 있지만 몸 자체는 아닙니다. 88세 되는 여성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노인으로 보지만 안에 있는 나를 보십시오. 나는 이 육체에 갇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답답합니다.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이 몸 안에 죄수와 같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몸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나는 미국인의 집에 살고 있고, 이분은 한국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중국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늙고 늙어 어느 날 없어질 것입니다. 이 집에 무너지면 우리는 나갈 것입니다. 사람은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인간이 혼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혼은 마음과 의지와 감정으로 되어있습니다. 혼은 다른 식으로 설명한다면 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성을 갖고 있지만 개성이 우리는 아닙니다. 개성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개성은 사회적인 기능입니다. 여러분과 관계를 갖는 것은 개성을 통하여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떠나면 어떤 사람이 스티브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혼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기능을 합니다.

    3) 사람은 영입니다.

    가장 깊은 있는 무엇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입니다. 사람은 영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영인데 혼을 소유하고 몸으로 살고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강아지가 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혹시 개가 개성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내가 여기 와서 강아지에게 혼이 있다면 아니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강아지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내가 애완동물로 갖고 있는 강아지가 혼은 있지만 영은 없습니다. 미국에는 애완용 강아지를 많이 기릅니다.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강아지는 영은 없지만 개성은 있습니다. 내가 밖에 있다가 들어가면 나를 반깁니다. 가끔은 흥분합니다.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집에 왔는데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강아지가 어디 숨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왜 숨어 있는지 압니다. 우리가 밖에 있을 때 분명히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짓을 벌려놨을 것입니다. 가끔 옷장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숨어 있을 때 그 강아지를 보면 그 강아지 안에서 움직이는 마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큰일났네’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서 감정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움츠립니다. 혹시 밖에 버리지 않을까? 계속 어디에 숨을까를 찾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강아지는 개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강아지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너무나 좋아하여서 강아지가 천국에 갈 수 없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영입니다. 우리는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2. 인류의 정체성(본질)

    인간의 신분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떤 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당신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둘 다 틀렸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발견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신분을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1) 정체성은 성취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때는 자기의 신분이 자기가 이룬 성취로 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수년간 목회를 통하여 성취한 것으로 나의 신분을 포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담임하는 교회가 성장하면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나에 대하여 실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하고 섬기고 큰일을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취를 기초로 하는 행위는 하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세상의 방법입니다. 교회가 침체되고 있을 때에 나는 완전히 실패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 때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가 여러분의 업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역과 삶에 있어서 성공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 결과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자의 이론으로 표준을 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표준을 세워놓고 이 위를 온전히 걸어가야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준을 보면 여기에 갈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을 바라보면서 누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바울을 보고 누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생각으로 누가 예수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성공이라는 것은 결과를 가지고 측정될 수 없습니다. 성공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셨는가’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천국에 갔을 때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는 성공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지했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시도록 여러분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침대에서 여러분의 머리를 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성공이다.’

    성취를 기초로 한 행위는 정체성을 세우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할 행동을 결정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독교 종교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기독교 종교는 다른 종교보다는 다른 종교보다 나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관계입니다.

    제가 태국 방콕에서 연결된 사람 때문에 인도 뉴델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비행기를 탔는데 젊은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인도 사람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한 다음에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입니다.”

    “기독교 성경 말입니까? 나는 종교를 안 좋아 합니다”

    그래서 나도 대답했습니다. “나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수많은 전쟁을 만들어냅니다.”

    “맞아요. 교회 안에도 전쟁이 많아요.”

    “기독교는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당신 직업이 무엇이라고 했죠?”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기독교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무슨 차이점이 있습니까?”

    “크리스찬 종교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슬렘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갖고 있는 관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뉴델리에 착륙하기 전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잘 이해했는지 살펴주십시오. 기독교 종교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여야 기뻐할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죠.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것이죠. 그래서 들어오신 그날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이지요.” 그리고나서 이 인도 사람이 내가 29년 동안 한 번도 깨닫지 못한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전세계를 다니면서 기독교라고 말하는 종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율법을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종교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그 때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년간 기독교 종교를 연습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은 하나님과 갖고 있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어디에 포커스가 있습니까? 행위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까? 저는 수년간 내 안에 있는 이 씨름에 묶여 있었습니다. ‘나는 성경책을 더 많이 읽어야 돼.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전도를 더 많이 하고 더 도와주어야 하고 사역을 많이 해야 해.’ 목마른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이러한 행위를 더 많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나를 만족시키기 보다는 나를 더 갈증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목말라 있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지만 마시고 난 다음에는 더 갈증이 났습니다. 그리고나서 계속 마시지만 갈증은 더 납니다. 이것이 종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섬김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만족을 예수 안에서만 찾도록 디자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면 여러분은 자연히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섬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넘쳐나는 은혜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계시하였을 때 저는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보다 사역을 더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0:38-41)

    여기에는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섬기느라고 바빴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겼습니다. 40절에 보면 마르다에 대하여 나옵니다. 마르다는 분주하였습니다. 이 말은 방해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마음을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마리다의 포커스는 예수님을 섬기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 마리아에게 나를 도우라고 해주십시오.” 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나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택하였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을 찾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

    제가 거기 안에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마르다는 맥베이 목사를 위해 봉사하고 마리아는 설교를 잘 듣고 있습니다. 그 때 마르다가 와서 “목사님 빨리 마리아에게 일어나서 나를 돕게 해 주세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네가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마리아가 하는 일도 중요하잖아. 네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지 않니. 섬기는 것도 중요하고 안식하는 것도 중요하잖아? 두 가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놀랍게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한가지만으로 족하다고 합니다. 한가지만 필요하다고 합니다. 한가지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봉사는 관계 속에서 넘쳐나는 기쁨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드리겠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하여 침대를 꾸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어디 있니? 나는 몹시 목이 마르다.”

    현대교회는 마르다로 꽉 찼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안식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안식하고 있다면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그를 섬길 것입니다. 섬길 시간과 안식할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예수님 안에서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에너지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 복음증거를 하고 싶으신데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있다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성경을 읽고 있다면 지금 잘못된 장소에 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가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명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와서 ‘너는 참 열심히 하는 구나’라고 칭찬하실 것 같습니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강요한다면 율법주의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드린 것만큼 받으려 한다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가 하는 역할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보면서 사역해야 하는 것을 봅시다. 우리의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하루 종일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성경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전파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사람에게 전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 하는 모든 일에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할 때에 생명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공허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다면 아무런 역사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가서 그런 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회중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우리가 성취한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틀린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합니다.

    2)정체성은 관계에 의하여 세워집니다.

    ①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결혼입니다. 미국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가지만 한국에서는 여성들이 자기의 성을 갖고 있죠. 결혼을 하면 둘이서 한 몸을 이룬 것이죠. 더 이상 나뉘어진 삶이 아닌 하나의 삶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한 남자가 떠나서 연합할 때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분은 둘이 하나가 된 신분입니다. 둘이 나뉜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관계는 탄생입니다. 내 자녀들은 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나의 분신입니다.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관계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실망시킬 수는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관계를 안 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옛날로 돌아가서 태어나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신부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떠나서는 신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그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서로 닮습니다. 서로 닮고 같이 합니다. 아빠가 코가 크면 코가 크게 나옵니다. 눈이 비슷하게 생깁니다. 몸이 비슷합니다. 가족은 닮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합니다.

    3.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

    1) 성경은 우리를 성도, 성자라고 합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1:7)

    성도란 성자입니다. 신약에서 여러분은 63번이나 성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63번이나 성자라고 합니다. 지난달에 멕시코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과하마에 우리 본부가 있는데 그곳의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멕시코는 카톨릭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카톨릭에서 지정한 성인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과하마에 모든 성인들의 동상을 갖다놓는다면 여러분의 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자와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는 성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성자처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낌이 여러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네 명을 키우다 보면 제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항상 성자와 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행동하는 것이 여러분을 나타내고 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여장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여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는 탄생에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성자라고 합니다.

    2) 두 번째는 여러분은 의로운 백성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5:17)

    우리는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는데 어떻게 받았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선물로 왔습니다.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의롭게 된 것은 의를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행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그의 생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여러분의 신분을 바꾼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었습니다. 영혼이 죄인이었기에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되었을 때 그 안에 성령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삶 속에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롭습니까? 그분은 완전히 의롭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의롭습니까? 여러분은 완전히 의롭습니다. 여러분의 의가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었는데 지금은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여러분에게 들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5:21)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의롭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의롭게 만들어 달라는 기도를 제발 그만하십시오. 제가 만약에 박목사에게 “당신은 더 한국 사람이 되어야 돼. 기도 열심히 해서 김치를 더 많이 먹어서 한국 사람이 되어라. 네가 모르는 한국말을 더 배워봐.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기도해 봐. — ” 한국 사람이 어떻게 더 한국 사람이 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는 한국말을 다 몰랐겠지요. 태어나서 병원에서 김치를 먹지는 못했겠지요. 자라나면서 당연히 잘하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의로워졌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더 한국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라면서 더 성숙해질 수 있지만 더 의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의는 선물로 온 것입니다. 성경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의롭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하나님은 여러분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신적인 예술품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 가운데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신 후에, “진짜 멋있다. 나는 너무나 기쁘다. 내가 너무 잘 만들었다”고 표현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4) 우리는 거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3:16-17)

    이 구절에 3가지의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책이 여러분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죠.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성경이 당신을 거룩하다고 합니까? 그렇다면 나를 더 거룩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지금 강대상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잠깐만요. 그런데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강대상에 올라가 계십니다. 강대상에 올라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올라가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여러분은 거룩하십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거룩해지려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는 “거룩하게 되기를 그만하십시오. 이미 거룩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4:24)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 자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함과 진리와 영광 가운데서 창조되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삶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이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여러분의 삶입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린도전서6:17)

    제가 쉬고 있을 때 녹차를 마셨습니다. 녹차를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녹차를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이 차는 뜨거운 물인데 녹차가 그 안에 있을 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녹차입니다. 이것은 뜨거운 물 안에 녹차가 있다가 나온 것이 아닙니까? 녹차를 그 안에 집어넣었을 때 녹차의 뜨거운 생명이 물 안에 녹아서 물의 본질이 변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냥 물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분을 가진 차입니다. 녹차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본질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 왔을 때 여러분을 완전히 변화시켰는데 여러분의 본질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자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내가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자이지만 때때로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 후서1:4)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질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6)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표현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3:4)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 거룩하십니까? 아멘. 정말 믿으십니까? 의롭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이것은 진리입니다. 내가 느낌이 어떤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4. 믿는 자들의 의에 대한 오해

    의롭게 여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가 여러 가지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종종 믿습니다. 다음에서 의에 관한 잘못된 오해를 생각해 봅시다.

    1) 진보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오해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 노력하면 더 의롭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1:30)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의를 너희에게 준다고. 바로 내가 의라고 말합니다. 내 생명을 너에게 넣어주겠다. 너의 본질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너는 나를 소유하게 되었다. 너는 의의 가문이 되었다. 예수님은 얼마나 의롭습니까? 100%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몇%입니까? 100%. 사도바울은 몇 % 의로웠을까요? 100%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신앙의 영웅들은 몇%일까요? 100%.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00%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가야 더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 갑니다. ‘의’ 안에서 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성화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미 갖고 있는 의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의가 확실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구원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성화입니다. 여러분이 영에서 혼으로 그리고 육체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보한 이후에 보여준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직유에 의해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나는 의롭지 않지만 하나님은 나를 의롭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간단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너는 의롭게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시면 여러분은 의로운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5:19)

    2)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직위의 개념으로만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문자적으로 직위로만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해석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해석학에는 몇 가지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원리중의 하나가 원리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원리를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롬5:19절을 모십시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위치적으로만 죄인입니까? 실질적으로 죄인입니까?

    다음 구절을 보십시다.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실제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이라면, 우리가 지적으로 인정하여야 할 것은 실제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구절을 반으로 나누어서 이것은 실제적이고 이것은 실제적이 아니야 라고 말해서는 해석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예수 안에서 의롭습니다. 어떤 성경구절에 살아가면서 더 의로워지고 천국에 가면 더 의로워질 것을 이야기 한 성경구절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면 더 큰 죄인이 됩니까? 사람이 가는 곳이 그 사람의 어떤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는가가 사람의 신분을 확인합니다. 사람이 말로만 의롭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롬5:19절을 보여 주십시오.

    3) 의에 대한 오해 중에서도 또 한가지는 고백에 의한 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계속 고백할 때 더 의로워진다는 오해입니다.

    7과 강의에 가면 고백에 가면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만약에 고백이 의롭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여러분의 구원은 여러분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구원이 여러분의 행한 것과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성령을 주셔서 죄에 대하여 감지하게 되었고 회개의 영을 주시고 회개함으로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할 일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의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소명과 회개케 하심과 의가 선물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연합에 의한 의

    어떤 사람은 “나는 의롭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의롭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 안에 있는 예수라는 다이아몬드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보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신다고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보기 때문에 나를 의롭게 보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냥 보면 못난 자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 보면 놀래고, 통해서 보면 볼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바로 당신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예수님을 보시는 것입니까? 나를 보시는 것입니까? 바로 나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를 보십니다. 예수님과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이야기로 이 강의를 마칩니다. 1930년도에 미국에 경제 공항이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인데 많은 사람이 재산을 날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택사스에 농부 한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예인츠였습니다. 그는 공황이 다가 오자 은행의 이자를 갚지 못하고 가족을 돌볼 수도 없고 농장도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농장을 사려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못하여 농장을 압류 당하게 되었습니다. “공황으로 인하여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왜 나에게만 재촉합니까?” “미안합니다. 30일 내에 돈을 내지 못하면 은행에서 농장을 가져갑니다.” 그리고나서 은행원은 가고 그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는 농장을 잃어버릴 위기에 있었습니다. 돈을 내야 하는 그 날이 되기 며칠 전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석유회사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의 조사에 의하면 당신의 땅에 석유가 매장되어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번 파보아도 되겠습니까? 석유를 채굴할 허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며칠 있으면 내 땅도 아닌데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다음날 사람들이 와서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 날 8만 드럼의 석유가 나왔습니다. 예인츠씨가 상상할 수 없었던 돈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석유가 나왔고 더 이상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예인츠씨가 언제 100만장자가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땅을 소유한 그 때부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석유가 나왔을 때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소유한 때부터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그는 왜 가난하게 살았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29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저는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 제2과 새벽을 바라보는 어두움 | 은혜의 영성 – 스티브 맥베이

    은혜의 영성

    제2과  새벽을 바라보는 어두움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들을 당신에게 짐 지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장소(낙심된 장소)로 이끌려고 시도할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짐을 하나님이 져 주시기를 마침내 요청하기까지 당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더 큰 짐을 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깨어짐의 과정 속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자원을 다 소진하게 되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꼭 필요한 유일하신 자원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을 의지하는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율법주의에서 해방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통과하기 위한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기적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깨어짐,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때 존재하는 조건입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기독교인의 삶이 쉽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정점에 와서는 기독교인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되지만 그렇지 못함으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 예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수 있습니까?

    제가 박노철 목사(통역)의 삶을 모방하려고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이분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스데반 박으로, 한국말을 배웁니다. 한국 음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으로 행동하고 머리 색깔도 바꾸고 해도 이 사람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모방해도 나는 한국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죽고 다시 박씨로 태어난다면 한국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박목사의 삶을 모방할 수 없다면,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셔서 그의 삶에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낸 삶을 통해서 사시는 것, 그의 삶이 내 삶이 되는 것.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깨어짐 , 상한 심령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 마음을 언제 깨어버리십니까? 하나님의 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도구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고난입니다.

    1.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고난의 현실

    어떤 목사님은 기독교인은 고난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당한다면 절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의 감정과 반대되는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식과 반대되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느낌이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을 믿으십니까? 설교와 성경이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설교를 믿을 것입니까? 성경을 믿을 것입니까?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이 상한 심령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4:12-13)

    여러분의 삶 속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려움 당한 것을 이상한 일처럼 논해야 합니까? 성경은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그 계시가 다가온다면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하고 착각했습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그렇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말한 기쁨의 일은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의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영광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계시를 받으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기뻐할 것입니다. 이 계시가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러한 계시가 고난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자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도구로서 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스스로 재 헌신해 보신 기억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을 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내가 있었지만 저는 그분을 위해 얼마나 많이 재 헌신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밑바닥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원하는 내 자신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재헌신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 자기를 재헌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약해진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발견하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해서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사용받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약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강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한 것을 인하여 더욱 자랑하리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로 다가 올수 있습니다.

    1) 고난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기5:7)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욥기14:1)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16:33)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는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고난은 내가 한 일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난이 옵니까? 당신은 적어도 태어났잖아요. 사람이 태어났다는 의미는 고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2) 믿는 자들도 이 고난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상처와 아픔은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기23:1-9)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까?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의 느낌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적대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느낍니다. 자라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누르신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욥과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욥은 지속적인 절망감에서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의 상황을 스스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환란과 격정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적대자로 서 있고, 내가 하나님께 직접 말할 수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욥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욥이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8,9절에 보니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좌를 봐도 우를 봐도 없었습니다. 뒤로 보아도 앞을 보아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왜 안 계시는가? 이것이 바로 욥이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욥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느낌은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는 것 같고 그를 누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으로 가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 후서1:8-9)

    사도바울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성경을 믿으시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지금 사도바울은 굉장한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는 삶을 불살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닌 감당치 못할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의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절에 힘에 지나도록, 즉 내 능력 밖의 일을 주셨다고 합니다. 한글성경에는 내 힘에 지나도록 나의 고난의 짐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힘을 공급해주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의 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나의 고난이요 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짐입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잘 보시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짐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이해가 됩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삶에 대한 완전한 절망입니다. 현대 성경을 따라서 이해해 봅시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내 능력 밖의 것이기에 내가 죽고 싶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다 죽어갑니다. 여러분 사역하시면서 여러분이 만지는 것마다 다 죽어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목사로서 사역하는 여러분에게 목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옵니다. 그 고난은 목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지 ‘예수님 차라리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할 정도까지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만지는 것마다 죽음에 대하여 느낍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주셨을 까요? 왜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와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요? 9절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1:9)

    사도바울은 신적인 뜻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 고난은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이여 나에게 능력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스스로 믿는 그것을 깨트리기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사명은 목회를 이 정도까지 키워놓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의 교회의 사역을 일으키는 것은 여러분의 사역이 아닙니다. 제가 담임목사를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수 했습니다. 제가 제 사역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나의 사역을 크게 세우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제가 사표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잘못은 제가 사역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반석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하리라. 여러분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많은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가지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을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복숭아 과수원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복숭아는 크고 탐스러운 고급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나무는 작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작은 복숭아에게 가서 너는 창피한 줄 알아라. 너는 왜 저것만큼 크지 못했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두 복숭아는 자기의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바로 자기 나무에 연결되어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마태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와서 매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은 아주 쉽고 가볍다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하고 그분을 따른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때려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안식이요,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게으르다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통해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 속에 오셔서 내가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실 사역에 대하여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나의 사역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 좋든지 나쁘든지,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교회를 세우시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제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빌립이라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주 화요일 마다 내 사무실에 와서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빌립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서는 의료선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돌아가기 전에 맥베이 목사님이 말씀하는 만큼의 성경지식을 얻어 가기를 원했습니다. 6주간 성경공부를 하고 떠나기 전에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매주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저는 모든 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아프리카로 가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냐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바로 불어로 적었습니다. 불어로 적어서 바로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지는 동네의 추장이 매주 받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추장은 동네의 사람들을 다 모아서 그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질문들이 있는데 추장이 대답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장이 계속 편지를 보내오는데 자기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영어로 번역해 줄 테니 그 사람들에게 직접 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틀란타 조지아에서 한 사람하고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생을 통하여 이루실 일을 예수님은 하루 만에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무능력을 시인하고 그분 앞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약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내가 강해질 주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더욱 약해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고난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을 왜 허락하실까요?

    1)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모습을 노출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교회를 스스로 세워 보시려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저는 내 노력으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하나님이 아니잖아?’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통하여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의 능력과 의지했던 것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었습니다.

    육신이란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을 때 자기의 인생을 관리하려는 기술들에 견줄 수 있음이라, 그것은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육은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술을 안 마시기 때문에, 외도를 하지 않고, 훔치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고 사는 모든 것을 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형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탕자와 그의 형의 이야기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탕진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좋은 하모니를 이루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만족을 이루어 보려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가 먼 나라에 가서 살 때도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탕진했을 때 아버지가 화를 내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먼 나라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상해 있었을까요? 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슬퍼하신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마음이 상하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육적인 삶을 따라 갔다는 것, 이것이 아버지를 슬프게 했습니다. 아들이 돼지치기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그는 내 아버지의 종이라도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종으로라도 나를 받아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기 전에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을 연습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나를 종으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를 아들로 받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종으로라도 받아준다면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주님께 돌아올 때 내가 이제는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탕자가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보았습니다. 아들은 ‘나는 당신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려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송아지를 잡고 좋은 옷을 준비하고 가락지를 끼우라고 명령합니다. 아들이 연습한 말을 아직 꺼내지도 못하였는데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인 것은 종으로 잘 섬기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가 아들이었기 때문에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는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더 큰 교회를 멋있게 부흥시킨 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너는 왜 들어오지 않니?”

    “당신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돌아오니까 이런 잔치를 열어줍니까? 나는 수년 동안 아버지를 섬겼는데 이같은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없잖습니까? 송아지를 잡아서 내 친구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인 적이 없잖습니까?”

    큰 아들은 나의 섬김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장남은 자기가 열심히 했기에 당연히 잔치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탕자와 같이 장남도 똑같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나 장남에 대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사랑한 이유는 그들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그 정도로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릴렉스(relax)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사랑을 강하게 할 수도 없고 약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의 행위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상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변할 수 있습니다. 타락할 수도 있고 신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육적인 삶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육적인 삶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육적인 삶을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이는 육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술 취한 육적인 사람이나, 교회 안에 있는 율법적인 육적인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육이라는 것은 내 능력으로 내가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두 개의 가지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악과의 두 가지의 양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2:8-9)

    이 나무는 선을 알게도 하고 악을 알게도 합니다. 이 나무에는 두 가지의 가지가 있습니다. 선과 악의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보십니다.

    어느 날 아침에 아담이 자고 있었습니다. 이브가 아담을 깨웠습니다.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지금까지 깨우지 않았어요! 여기 과일이 있어요!”

    아담이 일어나서 화를 냈습니다.

    “나를 깨우다니, 어떻게 과일을 갖다놓고 나를 깨울 수 있어! 이 과일로 나를 괴롭게 하려는 거지!”

    그러면서 과일 접시를 던져버렸습니다. 하와는 숲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런 아담의 행동은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악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 모습을 모시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니지요. 나중에 아담이 후회를 하였습니다. 하와에게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일 잘 대해주고 여왕으로 만들어 줄께.”

    그래서 다음날 하와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담이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여왕으로 대해줍니다. 그날 밤 하와는 아담에게 당신은 너무나 멋진 나의 왕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날 아담은 선을 행했습니까? 악을 행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의 행한 일을 보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첫날에는 좀 나쁜 일을 했지만 그 다음날에는 좋은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첫날에는 선악과의 악의 가지를 택했고 그 다음날에는 선한 가지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이틀을 통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틀 동안 선악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가지를 선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무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내가 율법주의자의 목사였을 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나쁜 행동을 그만두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안주머니의 담배를 갖다 버리십시오, 술을 그만 마시십시오. 아내에게 잘하십시오. 즉 행위,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이 살게 한 사람은 예수님이 그의 행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규율과 법칙을 강조하지 않아도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행동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바꾸시려는 것이지 가지를 바꾸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도를 가르칠 때 그들의 행위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신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사랑의 관계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시오. 나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아주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더 이상 규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더욱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계속 실패에 빠집니다. 그들을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 율법주의의 견고한 쇠창살을 깨 부십시오. 교회에서 진리를 말씀하십시오. 목사인 나도 그렇게 살수 없다고 하십시오. 그러나 누군가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왔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가 우리를 통하여 사실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하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버리십시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버리십시오.

    2) 고난은 깨어짐을 위한 촉매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상한 심령, 깨어짐은 한 사람이 삶을 다스리는 자기의 능력 속에서 모든 신뢰를 포기할 때 존재하는 조건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16:25)

    우리 중의 몇 사람은 이런 일을 꼭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손을 때십시오! 교회 사역에서 손을 떼십시오! 더 이상 나의 교회가 아님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모든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내 손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다 가지십시오. 예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십시오. 내 삶이 여기 있습니다. 내 비전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개인적인 야망을 버립니다. 여기 내 삶이 있습니다. 내 삶을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를 잡아주시고, 내 삶을 어느 곳에든 사용하십시오. 내 삶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이상 강해지기를 시도하는 일에 지쳤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나는 더 약해지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1:26-29)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주옵소서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시죠. 그렇다면 고난이 올 때에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고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약하여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8살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저는 10살이 되었을 때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16살 되었을 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극장이나 볼링장 주차장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19살 되었을 때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지만 19살에 목사가 된 것은 미국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19살의 나이에 얼마나 나이 들어 보이려 했는지 모릅니다. 머리에 염색도 해보았습니다. 제가 지역교회 담임목사로서 21년간 섬겼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 주님께서 너무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남부 앨라바마에서 교회를 하였고 아주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우리교회만큼 빨리 성장하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문제나 이슈가 생길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왔고 저는 신문이나 방송에 나가기도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우리 도시에 음란서적을 들여오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시의회에 가서 이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신문 일면에 저의 얼굴이 빌리 그레함처럼 나왔습니다. 그처럼 크게 써주실 기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조지아 주의 어떤 교회 사람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시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제의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고 제가 거절을 하였습니다만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허락을 하였습니다. 주일날 다섯 사람이 왔고 그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내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그쪽으로 인도함을 느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섬기던 교회에서 제가 떠난다는 광고를 하였을 때 모든 사람들은 울기 시작하였고 나도 울었습니다. 나는 가기 싫었지만 하나님께서 가게 하였습니다. 떠나기 전날 자정 쯤, 모든 짐이 떠난 빈 방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 가족 모두는 차에 타고 조지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시를 빠져 나오는 데 거기에는 큰 플랭카드가 붙어 있었습니다. 몇 명의 교인들이 밤에 걸어 놓은 것입니다. ‘스티브 목사님 제발 마음을 바꾸세요.’ 나도 아내도 그것을 보고 함께 울었습니다. 좀 더 가다보니 플랭카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좀 더 가다 보니 또 하나의 플랭카드가 있었습니다. ‘제발 가지 마세요.’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마지막 도시를 눈물로 빠져나오고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길에 ‘아틀랜타에 가시면 거기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목사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써있었습니다. 우리는 3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지아에 들어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혹시 찰스 스탠리 목사님을 아십니까? 그분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유명하고 나도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이곳에 왔으니 그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가 부흥하면 그 교회로 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교회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심장과 영혼은 싱싱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3,4개월이 지나면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성장했는데 이교회는 왜 이럴까? 이교회는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을 모아놓고 이 도시를 구원하자고 하였습니다. 교회성장프로그램을 가져와서 열심히 하였습니다. 열심히 하였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 5년 동안 이 교회는 계속 감소하고 있었지만 내가 온 이후에도 그 감소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낙심하였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이 회중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 안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목사가 앨라바마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앨라바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일년이 지난 후 이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년 후 보고해야 할 모든 통계는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지 몰랐습니다. 나는 분명히 회중들에게 보고하기로 했는데, 진실을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1990년 10월 6일 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이 모든 통계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토요일이 지나가고 주일 새벽 2시경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무실 벽에 얼굴을 대고 울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껏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앨라바마에서는 교회가 잘 되었는데 여기서는 교회가 죽어가고 있잖습니까?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까? 교회를 죽이려고 데리고 왔습니까?’ 나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고소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내 삶의 전부를 드렸잖아요. 16살 때부터 메시지를 전했잖아요.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생각 속으로 왔지만 너무나 크게 들렸습니다.

    “스티브야 나는 너를 원한다. 오직 너를!”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고 큰 교회를 일으키시려고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식모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그 음성을 듣고 나서 컴퓨터에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나의 기도를 적었습니다. 26쪽의 왼쪽에 있는 항목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겠다는 사항들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들은 나의 포기할 권리들입니다. 즐거운 환경을 가질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받아들일 권리, 성공해야할 권리, 결과를 보아야 되는 권리, 사랑 받아야 할 권리,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적고 나서 마지막에 부분에 와서는 내 삶은 마치 아무것도 적혀지지 않은 깨끗한 종이 같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기대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를 깨끗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밑에다가 싸인을 하고 날짜를 적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에게 나와 함께 내 안에 나를 위하여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어떤 것이라도 허용하겠습니다. 나는 한 때 이 권리들이 나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권리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의 재량 안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990년 10월 6일 날짜를 쓰고 내 이름을 서명하였습니다.

    깨어짐이라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깨어짐의 장소에 와 계십니까? 아니면 사역들을 여러분의 손에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목사님들에게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결국 여러분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누구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는 깨어짐의 결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경영하려는 의지를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가르치려고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배가 고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황을 도와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힘을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더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데이빗은 저의 막내 아들인데 지금은 21살이 되었습니다. 3살적에 한밤중에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아이의 방에 가보니 너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병원에 빨리 달려가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가 어렸습니다. 아내는 나머지 3명의 자녀를 데리고 있고 나는 데이빗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장에 문제가 있어서 복통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숙변들이 떨어지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무척 아플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각한 병이냐고 물으니 심각해 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장 안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서 청소하는 방법과 무엇을 먹어서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 청소를 하자고 했습니다. 데이빗을 침대에 올리고 장에 무엇인가를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울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의사가 “맥베이씨. 이 아이를 꽉 잡아 주십시오.” 나는 아들에게 가서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의사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데이빗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이 사람이 이렇게 못하게 해주세요. 아빠 이 사람을 멈추게 해주세요. 제발 너무 아파요 그만해요!”

    한참을 그러다가 울기를 그친 데이빗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아빠 왜 저 사람을 말리지 않았어요?”

    3살 난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이해시키겠습니까?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짓누르면서 “데이빗, 나만 믿어, 아빠를 믿어 이렇게 해야만 돼!” 제 삶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외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그만하세요. 그만 하세요. 왜 이것을 그만두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에 대하여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비에서 고쳐져서 나오기까지 여러분을 깨뜨리고 깨뜨려지기 까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만큼만 그 자리에 둡니다.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옮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이제는 끝장이야’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삶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삶에 대하여 완전히 항복하는 지경까지 오셔야 합니다.

    절대적 항복(롬12:1-2)

    나는 완전히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나는 다음의 권리들을 포기합니다.

    나의 영 즐거운 환경을 가질 권리

    나의 의지 받아들여질 권리

    나의 마음 성공해야할 권리

    나의 감정들 나의 소유물의 권리

    나의 몸 나의 환경으로부터 구조받을 권리

    나의 환경들 결과를 볼 권리

    미래를 향한 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알 권리

    나의 가족 나의 환경을 이해할 권리

    나의 꿈들과 희망들 바르게 증명되어질 권리

    나의 과거의 성공들과 실패들 사랑받을 권리

    나의 습관들 배우자와 자녀를 가질 권리

    나의 문제들 하나님에 의해 쓰여질 권리

    나의 관계들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살 권리

    나의 재정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권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셨고 지금은 하나님께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권리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와 함께, 내 안에서 혹은 나를 통하여 원하시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시도록 허용하겠습니다. 나는 한때 이 권리들이 나의 것이라고 선언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권리들이 하나님께 속했으며 그분의 재량 아래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떤 일이라도 기쁨으로 행하실 수 있습니다.

  • 제1과 비참한 그리스도인 | 은혜의 영성 – 스티브 맥베이

    은혜의 영성

    제1과  비참한 그리스도인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오늘 제가 여기 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제 삶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간단한 메시지에 의해서 삶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메시지가 얼마나 새롭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회심하고 난 이후 29년 만에, 목사가 된지 17년이 된 이후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 주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내 신분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은혜 아래서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도덕주의라는 암 병에서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이 메시지를 나눌 때에, 그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었던 변화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전문가로 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믿음 안에서 여러분과 한 형제로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메시지 때문입니다. 저의 기도는 아주 겸손하게 이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나왔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기를 가지고 활동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변화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수년 동안 제가 깰 수 없는 패턴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동기를 얻어 일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헌신하고, 다시 동기를 얻고 재헌신하고 다시 실망하는 사이클 속에 살았습니다. 저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였을 때마다 주님께 충분히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바쁘고 활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하여 바빴습니다. 언젠가는 하루 105가정의 문들을 두드렸습니다. 이런 많은 가정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더욱 더 거룩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였을 때 주님께서 나를 더욱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저는 제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을 수요일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런 행위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동기의 수준에서 저는 열정적이었으며 저는 이 동기의 수준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시간이 감으로 점점 더 침체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과 비교해서 수준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사이클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자책하는 단계로 떨어진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책망했습니다. 왜 나는 좀 더 지속적이지 못할까? 나는 왜 믿음의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할까? 이런 단계 이후에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나를 재 헌신의 단계로 이끌어 갔습니다. 주님 앞에 약속하며 더 잘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겠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나누며 섬기며 더욱 헌신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동기의 사이클로 들어갑니다. 동기, 책망, 재헌신의 사이클이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반복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을까? 지속적인 권능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속적인 승리를 가질 수 있을까?

    1990년 주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29년 동안 저는 율법주의적으로 살았습니다. 저의 심장은 주님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심장과 나의 신실함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 머리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인데 삶을 발전시키려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보려고 하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은혜의 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십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율법과 은혜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육신의 삶과 은혜의 삶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율법적인 삶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걷는 삶인데,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육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제가 육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삶과 믿음의 삶을 비교해 봅시다.

    1) 육신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자기 자신을 바치는데 몰두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흉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육은 바로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능력을 가지고 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삶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육은 내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목사님들이 육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면 어떤 사람들은 토요일 저녁에 술을 많이 먹어서 눈이 충혈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육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적인 삶은 자기 아내를 속이고 딴 살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회사의 돈을 횡령하는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육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삶은 이런 삶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삶을 드려다 보면 이것은 아주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3:4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립보서3:4)

    바울은 ‘육적인 삶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을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육에 대하여 자랑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내놓을 수 있는 이력서입니다. 자기의 이력서를 내놓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육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신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내가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걸음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인데 육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2)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도록 맡기는 삶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통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법칙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포커스는 예수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하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입니다.

    2. 율법과 은혜의 체계

    율법이 한 쪽에 있고 은혜가 다른 한 쪽에 있습니다. 이쪽에 믿음이 있고 저쪽에는 율법이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은혜와 율법이 갖고 있는 근본을 봅시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의 근원이 에덴의 동산까지 갑니다.

    1) 창세기 2장 8-9절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2:8-9)

    바로 이 나무들이 두 가지의 시스템을 이야기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신약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시면서 사람은 생명의 나무를 인하여 살 것을 설계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생명의 나무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향한 처음의 계획이었습니다. 인간이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그 계획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15:4-5절의 내용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4-5)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 나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말합니다. 만약에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여러분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두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디자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 때에 그분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거두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내가 아닌 내 안의 예수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판단해 보십시오.

    저는 미국의 남부에서 자라났습니다. 거기는 아주 복숭아들이 많이 납니다. 저는 과수원에서 놀았습니다. 그곳은 아주 고요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끙끙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거기에 복숭아 하나가 흔들리면서 복숭아가 떨어졌습니다. 복숭아가 더 많이 자라려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끙끙거리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내면서 힘쓰자 열매가 더 많이 맺혔습니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입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합류가 되었을 때, 그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를 가르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는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선악을 가려냅니다. 선과 악은 도덕을 규범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2:16-17)

    하나님께서 이 나무에 대하여 이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탄이 옵니다.

    2) 사탄은 첫 번째 거짓말을 합니다. 뱀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뱀의 이야기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26-31)

    뱀이 ‘나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창조된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은 ‘너희가 이것을 먹어야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은데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너희가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고 싶다면 제가 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렇게 해야 닮을 수 있다고 설교를 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형상을 본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닮기 위해서는 이렇게 행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사탄의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뱀은 한 가지만 하라고 했지만 저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하라고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이번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는 좀 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거룩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주신 신분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가 누구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율법주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여러 가지 결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높이 계셨고 사람들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던 자기의 신분을 그 때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분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이후 무엇을 보았습니까?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살아왔지만 서로 벗은 것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에 벌거벗은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왜 전에는 벌거벗은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를 바라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에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이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신을 쳐다봅니다. 아담과 이브가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대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여 그들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잎사귀로 가렸지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주의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라보고만 있지 스스로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과 행위를 통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보려고 하는 방법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은 가치의 세계에 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일을 하고 어떻게 하면 나쁜 일을 피할 것인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그들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선악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선과 악이 같이 공존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도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도덕이 정해준 규범입니다. 그 이전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덕주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내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덕적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늘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이미 경건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규칙 때문에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결과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행위에 퍼포먼스가 있습니다. 저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경건한 행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넘쳐 흘러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저는 전에는 행하라, 행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고 성도의 행위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으면 그분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목사였습니다. 율법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손과 발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필요로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4)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잘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내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의 섬김을 꼭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원하고 있습니다.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한다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행전17:25)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은혜 아래서 걷고 쉬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신앙생활에서 평안함을 절대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아래서 쉬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율법주의에 끌려 다니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육신의 삶은 명성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육신의 삶은 성취욕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육신의 삶은 자기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육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이런 것들이 왔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두 가정이 나옵니다. 가인과 셋의 가정입니다.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한 가정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산 가정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4장 16-22절을 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세기4:16-22)

    가인의 후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습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을 구축하고, 어떤 사람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음악가입니다. 이런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4:26)

    그 때에서야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그들의 신분 안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가정입니다.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세기4:6-9)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그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름을 물어본다면 그리고 이름 이상의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면 물어보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뇌 전문 의사입니다.”

    “오 그렇습니까?”(놀라워하면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저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래요!”(우습게 여기며)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분의 가치가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육적인 삶, 율법적인 삶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강조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예수 안에 있는 나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의 삶의 핵심은 예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삶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더 열심히’를 생각하지만, 은혜의 걸음을 걷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노력해서 입니까? 믿어서 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노력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마리아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자매들이 조반 준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냄새가 좋습니다. ‘오늘은 사역을 그만하고 쉬면 좋겠다, 그러나 악한 사탄 마귀가 있으니 쉬면 안 되겠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 스케줄을 조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설교할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오늘을 병자를 많이 치유하여야겠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귀신을 쫓아내야겠다.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시니까, 그 이후에는 장례식에 가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야겠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될 거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하니까?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사역하셨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3. 은혜로 사는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넘쳐흐르는 은혜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교통 안에 넘치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5:30)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5:16)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한복음8:26)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한복음8:32)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한복음12:49)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14:24)

    예수님께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활기있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삶을 살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노력하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기사와 표적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사도행전2:22)

    성경은 기사와 이적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경우와 우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20:21)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는데 너희를 통하여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5:19)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몇 가지의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5:15절을 근거로 하면 전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이시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있었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행할 것을 믿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설교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픈 사람을 방문하고 상담을 하며, 행정을 하며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주님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다 더 해보라. 다 더하면 제로가 나온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그를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사역을 다 하십니다. 내가 어디에서 이 말씀을 전해도 대부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동행하시고 돕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면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를 통해 사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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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출처 : http://blog.daum.net/timberkang/10438532

  • 평화의 책임자

    http://qt.swim.org/user_dir/praise/praise_list/10-13.asx만약 당신의 마음과 삶 속에 주님의 평화가 없다면, 당신은 그 이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평화가 없어졌는지, 누구 때문에 문제와 갈등이 생겼는지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와 갈등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평화에 대한 책임을 당신에게 지우려 하신다는 점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아는 것은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곧바로 평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목의 대사로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야 합니다.

    ‘피스 메이커’는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밝히고 추궁하는 일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피스 메이커는 자신이 불화의 책임을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불화로 재물과 정신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불화를 부추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평화하면 평안하다」/ 김동호

    BGM(배경음악): 나의 사랑 나의 생명(앨범 : My Love My Life -김성은)